제 64회 현충일 추념식에 울려퍼진 감동 사연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주년 현충일 추념식에서 6.25전쟁 참전 학도병 고 성복환 일병의 부인 김차희 할머니(김 여사 오른쪽)가 쓴 편지를 배우 김혜수씨가 낭독하는 것을 들으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6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주년 현충일 추념식에서 6.25전쟁 참전 학도병 고 성복환 일병의 부인 김차희 할머니(김 여사 오른쪽)가 쓴 편지를 배우 김혜수씨가 낭독하는 것을 들으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보였다.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배우 김혜수(50)씨가 6·25 참전용사 유족의 편지를 낭독해 문재인 대통령과 참석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김씨는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추념식에서 김차희(93) 여사가 쓴 편지 ‘당신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을 낭독했다. 김차희 여사는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여해 백천지구 전투 중 전사한 고(故) 성복환 일병의 아내다. 유해는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로 모시고 있다.

편지에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 속에 김차희 여사가 살아온 한평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눈을 지그시 감고 경청하던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감정이 북받친 듯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표어 아래 거행된 이번 추념식에는 국가유공자와 유족,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1만여명이 참석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한 21발의 예포 발사 속에 시작된 추념식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날 추념식에는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고지 6·25전사자 유가족과 유해가 봉환된 국외안장 독립유공자 유족도 함께했다.

휴가 중 서울 원효대교에서 강에 빠진 여고생을 구출한 황수용 하사, 대구 저수지에서 물에 빠진 남성을 구출한 김대환 경위, 전남해남소방서 근무 중 강원도 산불 진화를 위해 가장 멀리서 지원을 간 정의성 소방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김규태 상사 등이 참여했다. 최근 청해부대 최영함 입항식 도중 홋줄 사고로 순직한 고(故) 최종근 하사의 부모도 추념식에 함께 했다. 분향을 마친 문 대통령은 고 최종근 하사 부모에게 다가가 분향을 권유하며 위로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현충일 추념식에서 대통령 내외분의 대표 분향을 순직 유공자의 부모님이 함께한 것은 6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문 대통령 내외는 한국전쟁 당시 시신을 찾지 못한 용사들의 위패가 봉안된 위패봉안관을 방문했다. 전사자 명부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문 대통령은 “이분들이 이름도 찾고 유해를 찾아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요”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 내외는 재일학도의용군 및 애국지사 위패에도 참배했다.

고 성복환 일병의 위패 앞으로 이동한 문 대통령은 김차희 여사에게 “꽃을 준비해 왔습니다. 바치시지요”라고 말한 뒤 함께 헌화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김차희 여사는 대통령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한동안 말없이 흐느꼈다.

다음은 김차희 여사가 남편 고(故) 성복환 일병에게 쓴 편지 전문

당신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 내게 남겨진 것은 당신의 사진 한 장뿐입니다. 뒤돌아보면 그 가혹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무 살에 결혼하여 미처 신혼살림을 차리지 못하고 큰 댁에 머물면서 지내던 어느 날, 전쟁과 함께 학도병으로 징집된 후, 상주 상산초등학교서 잠시 머물면서 군인들 인파 속에 고향을 지나면서도 부모님께 인사조차 드리지 못하고 떠나는 그 심정 어찌하였을까요?

전장의 동료에게 전해 받은 쪽지 한 장 뿐.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떠난 후 몇 달 만에 받은 전사 통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지요. 10년을 큰 댁에 머물면서 그 많은 식구들 속에 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살아 무엇할까, 죽고 싶어 식음을 끊고 지내면서도 친정 엄마 생각에 죽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연금 타러 오라는 통지를 받고도 며칠을 마음 아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흔적을 찾으려 국립묘지에 갈 때마다 회색 비석들이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어떤 이가 국립묘지에 구경하러 간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젊은 청춘을 바친 무덤을 보고 어찌 구경하러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삶의 고통 속에 찾은 성당은 나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도로 보내며 지낸 수십 년, 언젠가 당신과의 해후를 포기한 후부터는 영혼의 은혜가 따르리라 생각하며 당신의 생일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미사를 드렸지요.

이제 구순이 넘은 나이. 평생을 기다림으로, 홀로 살았지만 나 떠난 후 제사를 못 지내주는 것에 마음 아파 큰 댁 막내 조카에게 이야기를 꺼냈더니 조카가 허락해 주어 작년부터 당신의 제사를 올려주게 되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가끔은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남편을 위해 한 것이 없어 원망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망이 있다면 당신의 유해가 발굴되어 국립묘지에 함께 묻히고 싶은 것뿐입니다. 내게 남겨진 것은 젊은 시절 당신의 증명사진 하나뿐인데 그 사진을 품고 가면 구순이 훌쩍 넘은 내 모습 보고 당신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난 아직도 당신을 만날 날만을 기다립니다.
 

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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