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문기자 김연(북한학 박사)의 통일아우토반 칼럼

사진=MBN뉴스 캡처
사진=MBN뉴스 캡처

 

 

단단히 뿔이 났다.

“간부들의 일본새가 틀려먹었다.”

절대 권력을 누리는 최고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질책이다.

일을 하는 모양이나 자세를 뜻하는 ‘일본새’라는 표현을 동원해 거침없이 질타한 김정은 위원장.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고 본인의 심기까지 거론했다. 무오류의 수령이 내뱉은 꾸중에 주변 사람들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간이 콩알만 해졌을 법하다.

“당의 방침을 집행했다는 흉내나 내면서 일을 대충하고 있는데 대단히 실망했다. 기분이 좋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9년 6월 1일 자강도의 한 학생소년궁전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최근 리모델링한 건물인데도 샤워장에 물이 나오지 않은데다 수도꼭지마저 떨어져 나간 걸 보고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북핵 협상 교착 국면에서 자력갱생으로 경제난과 대북 제재를 돌파해 보려고 하는데 마음만큼 아랫사람들이 따라 주지 않아 더욱 화가 났을 지도 모른다.

이런 탓일까?

지난 4월

‘자력갱생’ 대명사격인 자강도의 당위원장 출신인 신임 김재룡 내각 총리. 사진=불교방송 캡처
‘자력갱생’ 대명사격인 자강도의 당위원장 출신인 신임 김재룡 내각 총리. 사진=불교방송 캡처

 

더욱 관심이 쏠린다. 김정은 위원장은 김재룡 자강도 당위원장을 내각 총리에 앉혀 자력갱생으로 경제난과 대북 제재라는 이중고를 돌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북한 경제통인 박봉주 부위원장 아래에 또 다른 돌격대장을 앉힌 셈이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김재룡 총리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게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디서 자랐는지, 경력은 뭐가 있는지 정부가 운영하는 북한정보 포털에도 나와 있는 게 없다. 생년월일은 ‘연대 미상’으로 기재됐고, 주요 경력도 2010년 평안북도 당 위원회 비서를 지냈고, 2016년 자강도 당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는 사실만 적혀 있을 뿐 2010년 이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경력 자체가 정말 깜깜이다.

한마디로 김정은이 북한 산간 오지인 자강도의 토박이 관료를 자신의 2기 체제 경제 수장으로 앉힌 것이다.

그래서 김재룡의 발탁 의도를 추론하려면 자강도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인구 130만 명에 행정구역 전체 면적의 87.5%가 산림인 자강도. 강계트랙터종합공장, 강계정밀기계종합공장, 2·8기계종합공장 등 수 십년의 역사를 지닌 북한의 대표적인 군수공업 기지가 있는 곳이다. 특히 강계트랙터종합공장은 포탄과 탄두를 만드는 곳으로, 2016년 9월 북한 5차 핵실험 이후 대북 제재 대상에 포함된 곳이기도 하다.

2017년 7월에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감시를 뚫고 이동식 발사차량을 통해 한밤 기습적으로 ICBM급 미사일을 쏘아올린 곳도 바로 자강도이다. 다양한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이 밀집해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만들어 보관하기에는 최적지로 꼽힌다. 더구나 자강도의 청천강 상류에서 수도 평양에 직접 전기를 공급하는 희천 발전소도 있다. 말 그대로 북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자강도가 관심을 끄는 건 바로 ‘강계정신’이라는 북한식 자력갱생의 발원지라는 점이다.

1998년 1월 말 자강도 도청 소재지인 강계시를 방문한 김정일은 당시 자강도 주민들이 두벌농사, 세벌농사는 물론 중소형 발전소 건설로 자력갱생을 시도해 이례적으로 생산량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면서 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에 크게 감명 받았다.

북한 당국은 자강도의 사례를 자력갱생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했다. 강계시 주민들이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수령 절대숭배의 정신을 받들고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경제적 고난을 돌파해 냈다’는 것이다.

이같은 모범적 자력갱생 사례를 칭송하기 위해 강계시의 이름에 붙여 만든 선전구호가 바로 ‘강계정신’인 것이다. 북한은 ‘강계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강도 주민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까지 제작 상영하기도 했다.

북한 군사 전략적 요충지이자 무엇보다 강계 정신이라는 고난 돌파와 자력갱생의 상징 지역인 자강도 책임자인 토박이 관리 김재룡은 1990년대 초반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북한 연형묵 총리처럼 자강도에서 경제성과를 내고 업무 능력을 보인 뒤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됐다.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핵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져있고, 대북 제재로 경제적 어려움이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 게다가 식량난까지 겹칠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오는 2019년 상반기에  김정은이 ‘고난 극복의 상징’인 자강도 책임자 출신을 자신의 집권 2기를 총괄할 경제 총책임자로 깜짝 발탁한 건 앞으로 북한 경제와 대외 관계를 어떻게 꾸려 나갈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이다. ‘자력갱생에 의한 경제 발전 모델’로 대북 제재를 뚫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2012년 김일성 100회 생일 때 김일성 훈장을 받은 김재룡 신임 총리는 “사회주의 건설의 근본 방향이며 발전 전략인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완강한 공격전으로 국가경제발전의 당면목표를 점령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김정은이 애착을 보이는 원산갈마지구를 방문해서는 ‘천년 책임, 만년 보장의 원칙’에서 경제를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권력 엘리트 총괄은 최룡해, 외교는 최선희라는 구도에다 경제는 김재룡이라는 삼각 기둥을 완성한 김정은. 산간 오지 출신 김재룡이 어떤 퍼포먼스를 보일지도 향후 북미 핵 협상과 ‘자력 갱생’ 경제 발전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이다.

 

김연/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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