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체포된 김대업의 모습. 사진제공=경찰청
필리핀에서 체포된 김대업의 모습. 사진제공=경찰청

 

 

지난달 30일 오후, 필리핀의 관광지 말라떼 거리 한 호텔에서 휠체어에 탄 사내가 황급하게 출입문을 나섰다. 그는 도우미를 독촉해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 호텔 출입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붙잡았다. 짧은 머리에 물이 빠진 반바지, 목이 늘어난 상의를 입고 있던 그의 행색은 초라했다. 17년 전인 2002년 대선을 뒤흔든 ‘병풍 사건’의 주인공 김대업(57)이 또다시 덜미를 잡힌 순간이었다. 검찰 수사를 피해 필리핀으로 도피한 지 3년 만이었다.

필리핀 현지 파견 한국 경찰인 ‘코리안 데스크’ 권효상 경감이 ‘김대업이 말라떼 인근을 돌아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한 건 지난달 초중순이었다. 수차례 탐문에도 김씨를 찾지 못하던 중 현지 정보원으로부터 새 정보가 들어왔다. 그가 말라떼의 한 호텔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협조요청을 거절하던 현지 이민청을 가까스로 설득한 끝에 체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체포 당시 그는 도피 뒤 여권이 만료돼 불법체류 상태였다.

 

필리핀에서 체포된 직후의 김대업. 사진제공=경찰청
필리핀에서 체포된 직후의 김대업. 사진제공=경찰청

 


김씨는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 아들 정연씨의 병역비리 의혹을 폭로한 인물이다. 이 후보 아들의 병적기록표가 위·변조됐으며 불법 병역면제를 은폐하려는 대책회의가 열렸고 신검 부표를 고의적으로 파기했다는 주장이었다. ‘병풍 사건’으로 불린 이 폭로는 당시 대선 판도를 크게 흔들어놓은 사건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대선 뒤 폭로와 관련해 명예훼손과 공무원 자격사칭, 무고 등 혐의로 감옥에서 1년10개월을 살았다.

병풍 사건 이전에도 이미 사기 등 전과 5범이었던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죄를 저질렀다. 2008년 초등학교 동창에게 개발 예정지라는 허위 정보를 갖고 땅을 소개하고 땅값 중 일부를 가로채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이후에도 경찰이 수사 중인 음주운전 사건을 무마해주겠다며 지인에게 800만원을 받고, 경기도 광명에서 동업자와 함께 불법 사행성 오락실을 운영해 체포되기도 했다. 이미 전과 9범인 그는 2011년 5월 강원랜드 사장 등에게 로비해 강원랜드에 CCTV를 납품하게 해주겠다며 업체 관계자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이번에 필리핀에서 체포됐다.

범죄 사실 이외에도 김씨는 2013년에 또다시 병풍 사건 관련 폭로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김씨는 종합편성채널 방송에 출연해 “2002년 병풍사건을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인 친 노무현계 인사와 사전 모의했다”며 “그 대가로 50억 원을 지불받기로 했으나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이 가져가 착복했다”고 주장했다. 친노 인사 중 유일한 지자체장이던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를 겨눈 발언이었다. 안 전 지사는 즉각 허위사실이라고 반박했다.

현재 김씨는 체포 뒤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한국 대사관의 요청으로 필리핀 정부가 김씨에게 추방명령을 내리면 수사관을 현지에 보내 가까운 시일 내 김씨를 데려올 계획이다. 경찰청 인터폴계 이지훈 경감은 2일 “필리핀과는 수사 공조가 평소에도 잘 이뤄져있어 절차가 복잡한 범죄인인도청구 대신 추방 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신병인도가 되는 편”이라면서 “김씨처럼 신병을 인도받는 예가 1년에 100건 수준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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