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성폭행을 당하고 달아나다 교통사고로 숨진 대구 여대생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몇 번 방송된 적도 있어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무려 19년, 한 여대생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한 마지막 법의 심판대가 열렸지만, 결국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범행 13년 만에 잡힌 스리랑카인이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것이다. 공소시효 10년이 지나 죄를 물을 수 없다. 초동 수사의 미비에서부터 성관련 사건에 대한 미진한 법적 토대, 사람들의 무관심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결국 우리 사회는 한 여대생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지난 1998년 10월 17일 일어났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정은희(당시 18세)양은 이날 새벽 5시 10분쯤 대구 구마고속도로에서 23t 트럭에 치여 숨졌다. 대학 축제를 마치고 집에 오던 정양은 집 반대 방향으로 7.7㎞나 떨어진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숨졌고, 입고 있던 속옷이 사고 현장 인근에서 뒤늦게 발견됐다. 수상한 점투성이였지만 경찰은 당시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채소장수였던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71)씨가 "딸이 억울하게 죽었다"며 매달렸는데도 경찰은 무시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건 초동수사의 허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에 피해자의 속옷 등이 발견되었는데도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죽음의 실체는 15년이 지나서야 드러났다. 2013년 정현조씨의 고소로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정양 속옷에 묻어 있던 정액 DNA를 'DNA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했다. 그러자 2011년 여고생 성매매 혐의로 입건돼 DNA를 채취당한 K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검찰은 재수사 끝에 정양이 K씨 등 스리랑카인 3명에게 성폭행당한 뒤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넘어 도망치다 맞은편에서 오던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지부진하던 수사에 희망이 보이면서 성폭행범들을 곧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찰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던 K씨를 붙잡아 공소시효 만료 직전 재판에 넘겼다. 공범 B씨와 D씨는 이미 스리랑카로 강제 추방된 뒤였다. 검찰은 K씨를 기소하면서 공소시효 10년인 '특수 강간죄'가 아닌 15년 시효의 '특수 강도·강간죄'를 적용했다. 공소시효가 남은 죄목을 걸어야 K씨를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14년 5월 법원은 K씨에게 1심 무죄를 선고했다. '강도죄'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공소시효를 늘이기 위해 강도강간죄를 덧붙였는데 '강도' 부분에서 의외의 일격을 맞은 것이다. 


검찰과 경찰은 특별수사팀을 만들어 2심을 준비했다. 'K씨 일당이 정양의 학생증 사진과 책 등을 훔쳤다는 말을 들었다'는 스리랑카인을 찾아 증인으로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K씨는 2015년 8월 항소심에서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심 재판부는 성폭행 범행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강도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고, 성폭행 혐의만으로는 공소시효가 지난 점을 무죄의 근거로 들었다. 증인 진술의 신뢰성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2년여 동안 이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 역시 원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K씨는 무면허 운전과 성추행 등 별건으로 집행유예 판결이 확정돼 곧 강제 추방될 예정이다.


19년 전 부실하게 초동 수사를 했던 경찰, 이후 유족의 숱한 진정을 무시했던 검찰은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검찰조차도 "피해자 앞에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의 유일한 단서였던 정양의 속옷을 찾아낸 것도 정양의 가족이었다. 이 사건을 15년 뒤 다시 수사하게 만든 것도 정양의 아버지가 검찰과 경찰, 청와대에 문전박대당하면서 100회 넘게 진정과 탄원을 한 결과였다. 


문제의 스리랑카인은 조만간 스리랑카로 추방될 예정이다. 검찰은 성폭행 공소시효가 20년인 스리랑카 정부에 이번에 추방되는 스리랑카인과 이미 도주한 공범 2명을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검찰이 피해자 가족의 탄원을 조금이라도 새겨 들었다면 사법공조 조약도 맺지 못한 나라에 범인을 처벌해달라고 '구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성폭행 공소시효가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리랑카에서라도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만시지탄이다. 


우리는 성폭행 살인범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처벌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무엇보다 아쉽고 화가 나는 것은 경찰이 사건현장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유가족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면 이번 사건은 초기에 해결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많은 미제사건도 경찰의 초동수사 미비가 불러온 측면이 크다. 피해자 정양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국민들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


"특별히 할 말은 없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었고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었다."





온라인팀







저작권자 © 피처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