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왔다. 국가 원수 생활 20년을 했지만 미국 가려다 몸수색 수모를 당하고, 서울에 올 뻔했지만 무산됐던 북한의 2인자 김영남. 그가 구순의 몸을 이끌고 남한 땅에 왔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검정색 외투에 가방을 맨 30대 여성에게 쏟아졌다. 


1987년 9월생. 올해 만 31세. 해방 이후 남한을 밟은 최초의 북한 ‘백두혈통‘ 김여정이다.


①“빨갱이들이 왔네.”…그렇게 화해와 협력 시대 열렸다


2000년 7월 29일 낮 12시 45분. 


중국 민항기 CA 123편이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당시 엄낙용 재정경제부 차관 등 정부 인사들이 영접장에 나와 있었다.


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고 일군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실내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때 우스개를 듬뿍 담은 작은 목소리가 귓등에 들려왔다.


“빨갱이들이 왔네” 


이 농담을 들은 통일부 관리는 기겁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혹시라도 북측 인사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떡하려고…말 조심해”


“에이 민감하기는” 


한 기자의 실없는 농담 소리였지만, 그렇게 남북 화해 협력 시대를 여는 1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시작됐다.  


당시 중국을 거쳐 서울에 온 전금진 북측 수석대표는 “용꿈을 꿨다”며 첫 회담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고, 남측 박재규 수석대표도 “합작 영화사를 만들어 둘이서 주연을 하자”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 전금진 북측 대표와 박재규 남측 대표가 손을 맞잡고 있다.



이후 남북은 2008년까지,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21차례의 남북 장관급 회담, 10여 차례의 남북 경협 추진위원회 회의, 남북 국방장관급 회의, 남북 적십자 회담과 16차례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가졌다. 화해와 교류 협력이 봇물을 이뤘다. 말 그대로 남북화해협력 시대였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간간히 남북한 접촉과 교류가 이어졌지만 2000년대 초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남북 관계는 얼어붙었다.


② 김일성의 손녀, 김정일의 딸,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


2018년 2월 9일 낮 1시 46분쯤 인천 국제공항


북한 김여정이 남한 땅에 왔다. 북한 김정은의 전용기 ‘참매 1호’를 타고 서해 직항로를 통해 인천 공항에 내렸다. 편명은 PRK-615편. 북한과 615 공동선언을 상징해 지은 비행기 편명이다. 북한 정권 2인자 김영남과 리선권, 최휘 위원장도 이 비행기로 함께 왔다. 18년 전 서울 김포공항에 내린 북한 수석 대표 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물급 인사들이다. 


김일성의 손녀, 김정일의 딸, 그리고 북한 권력자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귀한 분 오셔서 날씨도 따뜻하다”며 북측을 반겼고 환대를 받은 김여정은 다소 도도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응대했다. 김영남 위원장에게는 “자리에 먼저 앉으라”고 권하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여정은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함께 2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다. 구두이든 친서형식이든 김정은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인천공항 귀빈실에서 김여정과 김영남을 깍듯이 자리 안내하고 있다.



북한의 접근이 의도된 평화공세인지, 진정한 태도변화인지 가늠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남한으로서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기회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도 북한의 비핵화가 정책 최우선 순위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책 달성을 위한 접근 방식이 이들과 일치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당연히 이뤄야 하고 더 나아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고 궁극적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지상 과제를 갖고 있는 게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국내 진영은 북한 대표단 방문을 두고 대립할 것이다. 북한 의도를 놓고 첨예하게 의견 충돌할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한민국 정부의 과제는 보수 정부이든 진보정부이든 결코 외면할 수 없고, 사라지지도 않는 지상명제이다.


평창 올림픽 개막 전날에 대규모 군사 열병식을 연 북한. 자신들의 건군절 70주년 행사를 올해 2월 8일에 연 북한. 그래서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혹시라도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이나 신호가 나왔다면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남북 평화 무드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건 당연했을 거다.


하지만 북한은 열병식에 불렀던 외신의 초청을 취소하고, 열병식 규모도 줄이고 녹화 중계로 대체했다. 비록 화성 14형과 15형 등 ICBM급 미사일이 나왔지만 새로운 전략 무기는 등장시키지 않았다. 평창 올림픽 개막 전날 열병식을 개최해 위기를 고조시킨다는 한국과 미국 내 논란을 조금은 비켜가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팽팽하게 엇갈린다.


미국 펜스 부통령은 “올림픽 메시지를 북한의 선전술이 납치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고, 일본 아베 총리는 “북한 미소 외교에 눈을 뺏겨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평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고 했고 틸러슨 미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각료들도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방남을 두고 “일단 두고 보자”고 한다. 


평창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평창 이후엔 한반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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