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특명 받고 왔습니다.“


북한의 잠재적 미래 지도자 김여정.  김정은 특사로 온 거냐고 문재인 대통령이 묻자 거침없이 답했다. 2월 10일 청와대 방명록엔 특유의 김씨 일가 필체로 “통일 번영의 미래가 앞당겨지질 기대한다”고 썼다. 


‘특사(特使)’. 말 그대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온 사람이다. 최고 지도자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사절이기에 특사 회담은 간접 정상회담 혹은 사실상의 정상회담이다. 


① ‘김정일 답방 동선‘ 사전 답사한 김용순


2000년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9월 11일 북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남한을 방문한다는 통일부 발표는 남북관계를 취재하던 기자들에겐 차라리 악몽이었다. 


“김용순이 온다고?” 북한에서 대남 관계를 총괄하는, 김정일로부터 ‘용순 비서’라는 애칭(?)으로 불린 북한의 실세. 김용순이 김정일 특사로 온다는 소식에 통일부 출입기자들은 고스란히 추석 연휴를 반납했다. 


그런데 ‘특사’ 김용순의 일정과 동선이 묘했다. 


남북 직항로로 김포공항에 내린 김용순 일행은 방문 이튿날부터 제주와 경주 포항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으로 남한 곳곳을 누볐다. 


당시 언론은 김용순 비서가 ‘남쪽 땅’에서 뜻깊은 추석 명절을 보냈다고 썼다.


12일 오전 제주도에 도착한 김용순은 ‘민속자연사박물관’ ‘도깨비도로’ ‘애월읍 항몽유적지’ 등을 돌았다. 자연사박물관 대형 수족관에 있는 4.5m의 산 갈치를 보고 관심을 나타냈고, ‘도깨비 도로’에선 오르막길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자동차가 내려가는 ‘착시현상’에 놀랐다. “차가 내려가는 걸 직접 봐야지”라며 자신이 탔던 체어맨 1호의 시동을 끈 채 실험까지 했다. 



▲ 김용순 비서의 제주도 방문 당시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용순 비서.



13일엔 공군기편으로 대구로 이동한 뒤 포항제철소로 향했다. 포항 제철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뒤 철판을 생산하는 제 2열연공장과 쇳물을 뽑는 4고로 등 포철의 핵심설비를 견학했다. 이어 경주 보문단지를 방문했고 불국사와 석굴암 등 역사유적을 둘러봤다.


김용순의 남한 내 동선은 김정일의 남한 답방 때 방문할 지역으로 비쳐졌다. 북한에 환상의 섬인 제주도와 경제 발전 상징인 포항 제철, 그리고 천년 고도 경주. 김정일이 관심을 가졌을 법한 장소였다. 


당시엔 김정일 답방이 언제 이뤄질까 하는 게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김용순 특사 방문 때 이와 관련한 합의도 이뤄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가까운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며 이에 앞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먼저 서울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경의선 철도 연결, 경제 시찰단 파견 등 굵직한 합의도 뒤따랐다. 


② “합의하면 뭐해 지키지 않는데”…특사는 ‘열쇠’  


2000년 남북관계의 훈풍은 1년이 안 돼 역풍을 맞는다. 2001년 3월, 남북은 5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회담 첫날인 3월 13일. 회담장인 서울의 한 호텔에 난데없는 통보가 날아든다. 


북한이 3월 13일 오전 우리 측에 전화 통지문을 보내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회담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고 통보한 것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난데없는 일방적 통보에, 그것도 회담 당일 아침에 통보하는 무례함에 남측은 놀랐고 당황했다. 


그 이후 남북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반 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홍순영 장관을 수석 대표로 하는 5차 장관급 회담이 9월에 열려 13개 항에 합의했지만 이는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경추위 개최 등 13개항을 합의했지만 북측이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측은 합의 미 이행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6차 회담을 열어 미이행 문제를 논의하자고 촉구했다. 하지만 이번엔 회담 장소가 평양이냐 금강산이냐 묘향산이냐 하는 문제로 기싸움을 벌였고, 우여곡절 끝에 6차 ‘금강산’ 남북 장관급회담을 11월에 열었지만 결국 참화를 불러왔다. 9.11테러 이후 남측이 발령한 비상조치를 두고 북측이 자신들을 겨냥한 군사 조치라고 해석하면서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갔고, 서로 얼굴만 붉힌 채 아무런 합의 없이 헤어진 것이다.


남북관계는 이후 꽉 막혔다. 별다른 돌파구도 없이 갈등만 고조됐다. 그 사이 북한은 부시 행정부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돼 긴장은 더 고조됐다.


이를 풀려고 한 게 특사 방북이었다. 임동원 특보가 2002년 4월 3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것이다. 


임동원 특사는 김정일에게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고, 김용순과 회담에서 서로 긴장상태가 조성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경추위 회의 등 동결됐던 남북관계를 원상회복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남북관계는 조금은 순탄하게 굴러갔다. 그해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 발발 전까지….


③고비마다 새 길 열고 막힌 곳 뚫는 특사…이번엔?


이렇듯 새로운 길을 열고 막힌 곳을 뚫는 게 특사 회담의 묘미다. 


북한은 김여정이라는 ‘백두혈통’을 특사로 보내 나름대로의 승부수를 던졌다. 김정은의 선수에 남한이 이제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이다. 언론에선 대북 특사로 벌써 여러 인물을 거론한다. 


하지만 문제는 대북 특사로 누구를 보낼까가 아니라 남한이 처한 상황이다. 





남북 교류로 북한과의 관계를 풀어야 하지만 북핵 문제가 얽혀 있어 난제다. 핵문제를 제쳐두고 북한과 대화에 나선다면 국제 공조가 흐트러질 것이다. 전례 없는 대북 제재로 북한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관측도 있는데다, 최고의 압박이 최대의 관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고 보면 우리 정부의 행동반경은 그리 넓지 못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의 평양 초청에 대해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간에 조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을 통해 워싱턴으로 가려는 북한, 핵 문제를 외면한 채 평양에 갈 수 없는 남한.


남한 특사의 평양 방문과 남북 정상 간의 만남, 이 모든 게 가능하려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조그마한 단초라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북한과 미국 사이에 어떤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결국 우리 정부의 활동 영역은 이 미묘한 공간을 메우는 역할일 텐데… 묘수는 뭘까?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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