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굵은 뿔테 안경을 쓴 30대 중반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 탁자에 앉았다. 앞에는 금장 테두리에 한반도와 독도가 황금색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흰색 종이가 놓여 있다. 동생 김여정 부부장으로부터 건네받은 만년필을 손에 쥐더니 잠시 긴장한 듯 숨을 크게 내쉰다. 


그리고 방명록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다.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만들었고,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즐겨 구사했던 바로 그 주석 서체로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메시지를 담았다. 한반도와 전 세계를 향해 평화의 시대를 강조했다.


그런데 시계를 다섯 달 전으로 되돌려 보자.


또 다른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주석 서체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시험발사 승인한다

당과 조국을 위해 용감히 쏘라”


2017년 11월 28일 김정은은 자신들이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ICBM, 화성–15호의 시험발사를 이렇게 승인한다. 이후 북한의 화성 15호 발사는 성공이니 실패니,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확보했느니 못했느니 하면서 국제사회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국을 직접 겨냥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미국 사회의 위기의식을 극대화시켰다. 이후 북미 간의 대결과 유엔 안보리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압박이 거세졌다.


그랬던 김정은이, 미사일을 용감히 쏘라던 김정은이 불과 다섯 달 만에 평화를 이야기한 것이다


김정은이 다섯 달 만에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일까? 무엇이 이런 전환을 가져오게 했을까?


미국은 자신들의 대북 압박 정책이 효과를 봤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때보다 강력한 대북 제재가 북한에 먹혔고, 김정은이 어쩔 수 없이 대화의 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한편으로 맞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국제사회의 가혹한 제재를 받아왔고, 그 제재를 소위 자력갱생이라는 내핍으로 버텨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김정은의 태도 변화를 북한 내부 요인과 작동 원리 등에서 찾는 게 오히려 합리적일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①북한의 국가이익 추구와 ②김정은의 인정받기 욕구로 해석한다. 


모든 국가는 그 나라의 국가이익을 수호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북한은 핵과 경제 병진 정책을 2013년 국가 전략으로 설정했다. 핵 무력이 완성되면 경제에 모든 걸 쏟아붓겠다는 전략이었다. 2017년 11월 화성 15호 발사로 핵 무력을 사실상 완성한 북한으로서는 당면 과제가 경제로 바뀌게 되는 것은 국가 전략상 자연스럽다. 김정은 위원장도 2018년 신년사에서 경제 개발을 위한 총력 정책을 공표했다.





또 다른 요인은 인정받기 욕구이다. 인간 모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에 착안한 [역사의 종말]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 발전 동력을 ‘인간의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경제력과 핵 무력을 모두 갖춘 강성 국가의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욕구와 김일성·김정일을 능가하는 권력자가 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최고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바람이 김정은에게 존재할 것이다. 


띠라서 미사일과 평화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건, 2012년 권력 승계 이후 북한이 꾸준히 추구해 온 국가 전략과 김정은 위원장의 욕구가 합치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들의 국가 전략에 따라 군사적 도발에서 평화 우위로 전환한 북한.


문재인 정부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사된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남북은 역사의 대전환점이 될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전 세계에 알렸다. 더 이상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천명했고,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도 확인했다. 


하지만 실천과정은 무척 험난할 것이다. 무엇보다 관건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달려있다.


[판문점 정상회담 ②]로 이어집니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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