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2018년 5월 12일 강경화 외교장관과 함께 미 국무부 기자회견장에 섰다. 북한 번영에 대해 언급했다.


"북한이 신속한 비핵화를 위해 과감한 행동을 취할 경우 미국은 북한이 한국의 친구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번영을 달성하도록 북한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것이다. “김정은 북한 위원장이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면, 북한에 평화와 번영으로 가득 찬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 역사까지 거론했다. 미국은 한국인들을 위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지원을 한 업적이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2차 대전 후 유럽 등에서 진행한 전후 복구 프로그램, 마셜플랜이다.


‘북한번영’ 마셜플랜의 구체적 내용은 미국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소개했다. 


미국의 세금을 들여 북한을 지원할 수는 없지만, 대북 제재를 풀어 미국 자본이 북한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농업 장비와 기술, 에너지가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인데 김 위원장은 미국 기업인과 모험가, 자본 공급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적 자원과 자본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 폐기와 대북 직접 투자라는 핵-경제 빅딜을 사실상 공표한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제의는 처음은 아니다.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과 재건을 제안한 사례는 북한 비핵화 협상의 역사와 같이할 정도로 많다. 대표적인 게 부시 행정부의 2002년 과감한 접근법(Bold Approach)과 이명박 정부의 2009년 그랜드 바긴 (Grand Bargain) 제안이다.


이 두 정책은 당시에도 통 큰 제안이어서 성사 여부가 주목됐지만 결국 무위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①2002년 11월 부시의 ‘과감한 접근’(Bold Approach)


2002년 11월 15일 부시 미국 대통령은 대북성명을 발표한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북한과 다른 미래를 갖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고 미국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이어 경제 재건을 위한 협력 의사도 피력했다. 북한 주민의 생활을 상당히 향상시키는 중요한 조치들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도 강조했다. 북한에 대한 ‘과감한 접근‘(Bold Approach)을 전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성명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과감한 접근법은 ’북한이 핵 폐기를 한다면 북미 국교 수립과 북한 전력 공급을 위한 화력발전소 건설, 경제제재의 해제, 아시아 개발은행 가입 지원 등 ‘북한 재건과 국제사회 편입’이라는 포괄적인 내용이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 북한의 개혁·개방을 재촉하는 목적“이 담긴 미국의 제안은 북한과 고위급 실무협의까지 진행됐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부시 대통령이 당시 성명에서 북한이 농축우라늄 핵 개발이라는 은밀한 핵 프로그램을 추구하고 있다며 북미 제네바 합의에 따라 진행되던 대북 중유공급을 그해 12월부터 중단한다는 한반도 개발기구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핵 포기가 없으면 대화와 협상도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같은 언급에 북한은 압박을 통한 체제 전복의 의미가 더 많다고 판단했고, 과감한 접근법이라는 것은 부시 대통령의 시간벌기 전략으로 해석했다. 두 나라의 불신으로 ‘과감한 접근법’은 무위에 그친 것이다.


② 2009년 9월 MB 그랜드 바긴(Grand Bargain) 추진 





2009년 9월 22일 뉴욕을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북핵 프로그램 핵심 부분의 폐기와 동시에 대북 안전보장과 국제 지원을 본격화하는 일괄타결, 그랜드 바긴(Grand Bargain) 추진을 제안한다. 


“북핵 완전 폐기라는 본질은 제쳐둔 채 핵 동결에 타협하고 보상하고, 북한이 다시 이를 어기는 패턴이 지난 20년간 되풀이됐다”며 근본적 해법으로 ‘통합된 접근법(Integrated Approach)’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랜드 바긴은 북한이 북핵 개발을 ‘중지’가 아닌 ‘폐기’ 단계로 나아간다면, 한국과 미국 등 5개국은 이에 상응하는 체제 안전보장과 국제 지원을 약속하겠다는 것이다. 이 방안의 핵심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 연료봉이나 추출된 플루토늄 등을 먼저 국제사회가 확인할 수 있는 절차와 방법을 거쳐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행동을 단번에 보여주면 그에 맞춰 대규모 지원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북핵 ‘핵심 부분 폐기’는 미사용 핵연료봉 해외 반출, 영변의 5메가와트급 원자로 구성 장치의 폐기 등의 시나리오가 포함돼 있었다. 


단계적 접근이 아닌 포괄적 접근으로 북핵 문제와 체제 보장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MB의 그랜드 바긴 제안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커트 켐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그랜드 바긴 발표 직후 "진짜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것을 모른다"고 말했고, 심지어 미국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북한 핵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다는 것은 '무리'라고까지 지적했다. 미국 대북정책의 실무 총책임자인 동아태 차관보가 모를 정도로 한-미간의 정책 공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북한 역시 그랜드 바긴 제안을 일축했다. "일괄 타결안은 이미 규탄을 받고 폐기된 '비핵 개방 3000'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핵문제는 철저히 북미 사이에 해결돼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 것이다.


북한은 물론 미국과의 교감도 없었던 MB의 그랜드 바긴 제안. 미국과의 정교한 정책 조율을 마친 뒤 이를 토대로 북한에 제안해야 한다는 정책 실행 방법론이 간과된 탓에 MB표 그랜드 바긴은 말 그대로 사장됐다. 


③ 폼페이오 ‘북한번영’ 마셜플랜은?





폼페이오의 ‘북한번영 발언’도 부시와 MB의 대북 제안과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당시엔 북-미 간의 믿음이 없었고,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들이 뒤따랐기에 부시와 MB의 제안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북한과 미국은 비핵화와 경제지원 및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합의를 과거 2차례 문서화 한 적이 있다. 2000년 북미 공동 코뮤니케와 2012년 북-미 간 2.29 합의가 바로 그것이다. 


2000년 10월 상호 존중과 내정 불간섭을 위한 북미 공동 코뮤니케가 발표됐지만 2001년 집권한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그에 맞선 북한의 핵 개발로 사문서화 됐고, 2012년 북미 2.29 합의에서 자주권 존중과 양국 관계 개선이라는 점에 동의했지만 이후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이 역시 사문화된 것이다. 불신과 신의를 저버린 행동으로 합의 자체가 무산된 것이다.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북한 최고 지도자의 비핵화 의지를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인 폼페이오 장관이 두 번이나 평양을 방문해 직접 들었다는 점이며, 대북 체제 안전보장과 경제재건 약속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제안’에 북한 지도자가 만족감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미국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번영을 위한 협력’을 언급한 직후 북한 외무성은 공보를 통해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진행하겠다고 공개했다. 한국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 등 각국의 기자들도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북한과 미국이 서로 믿음을 깨뜨리지 않겠다는 걸 행동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북-미 간의 신뢰 구축이 비핵화와 경제재건을 위한 핵심 지름길이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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