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보이의 귀환이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북한 차석대표, 

1999년 북미 미사일 회담 북한 수석 대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북핵 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 


굵직한 협상마다 등장했던 북한의 외교일꾼.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타결시키고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 낸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는 북한의 대미 협상 야전 사령관. 올해 우리나이로 76살 노병의 갑작스런 등판이었다.


2016년 김정은 위원장의 주 북한 쿠바 대사관 방문때 동행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북한 외교부 김계관 제1부상. 개인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면서 직설적인 말을 쏟아냈다. 


“북한의 일방적인 핵포기를 강요한다면 북미 정상회담도 재고할 수 있다” “북한은 핵을 포기했다가 처참한 말로를 걸은 리비아나 이라크가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핵 개발의 초기 단계였던 리비아를 핵보유국인 북한과 대비하는 것 자체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존 볼턴 미 백악관 안보 보좌관을 겨냥했다. 리비아 식 핵 폐기를 강조하는 “볼턴 같은 사이비 우국지사”의 말을 듣는다면 북미 관계는 파탄날 수도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① ‘볼턴 대 김계관' 





2002년 10월 당시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의혹이 불거지면서 위기가 고조됐다. 미국은 94년 제네바 합의를 북한이 위반했다며 북한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북한이 매우 필요로 했던, 그리고 경수로 건설과 함께 제네바 합의의 핵심이었던 대북 중유 지원을 중단한다는 초강수를 미국이 꺼내들었다. 결국 제네바 합의는 사문화됐다. 이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이 당시 미국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이었던 볼턴이었다. 


말 폭탄도 주고 받았다. 2003년 볼턴은 김정일 위원장을 ‘폭군 같은 독재자’라고 쏘아 붙였고, 북한은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며 볼턴은 ‘인간 쓰레기이며 피에 굶주린 흡혈귀’라고 맹비난했다. 


이런 볼턴이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한 북한이 ‘볼턴만은 안된다’고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고, 볼턴이 미국 수석대표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김계관 부상은 2003년 8월 1차 6자회담에서 빠졌다. 미국도 존 켈리 당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북핵 6자회담 수석 대표에 임명했다.(북한의 항의가 통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② ‘볼턴 대 김계관‘ 


볼턴이 참석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김계관 부상은 2004년 2차 북핵 6자회담 때부터 북한 측 수석대표로 꾸준히 6자회담에 나온다. 미국의 수석대표는 켈리 차관보와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국 대사 등 대북 협상파들이 배턴(baton)을 이어받으며 6자회담을 이끈다.


몇 차례의 진통 끝에 6자회담 대표들은 2005년 가을 9.19 공동성명이라는 합의에 도달한다. 북한 핵 포기를 위한 행동 대 행동 스케줄이 포함된 합의안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2005년 9월 북한을 패닉으로 몰아간 이른바 방코 델타 아시아(BDA) 사건이 터진다.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 BDA 은행이 북한의 불법 자금 세탁을 돕고 있다며 이 은행 계좌를 동결시킨 것이다. 북한 소유 계좌 50여개가 동결됐고 그 계좌에 들어있던 2400만 달러도 얼어 붙었다. 큰 돈이 아닐 수도 있지만 김정일의 통치 자금이 묶였다는 상징성 때문에 북한 당국은 무척 당황했다. 김계관 당시 북한 6자회담 대표는 9.19 성명 이후에 나온 BDA공세로 ‘피가 마른다’고 고통을 토로했을 정도다. (이후 북한은 2006년 핵 실험등으로 미국을 압박했고 그 대가로 BDA제재 해제를 받아낸다.) 


그런데 당시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주도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재직 중이던 존 볼턴이다. 


볼턴과 김계관 두 사람의 악연 시즌 3인가?





두 차례의 사례에서 보 듯 김계관 부상에겐 볼턴은 눈엣 가시이다. 그래서 이번 김계관 부상의 개인 명의 담화는 리비아식 완전 비핵화를 주장하는 볼턴을 북미회담 과정에서 빼라는 요구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물론 북한 당국의 의중이 담긴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당할 볼턴이 아니다. 자신을 ‘사이비 우국지사‘이라고 묘사한 김계관에 대해 문제의 인물이라며 바로 반박한 것이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6자회담에서 항상 '문제 있는 인물'이던 6자 회담 전문가”라고 김계관 부상을 묘사하며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북한이 노련한 대미협상 전문가를 다시 불러 낸 것이 단순히 ‘볼턴 배제’ 메시지를 트럼프 행정부에 전달하기 위한 원 포인트 구원 등판인지, 아니면 현재까지 진행된 북-미간 물밑 협상의 틀 자체를 바꾸기 위한 시도인 건지, 해석이 분분하다.


미국 백악관은 일단 북한 비핵화는 정해진 틀은 없고 ‘트럼프’ 모델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판을 바로 깨지는 않겠다는 신중한 모습이다. 하지만 동시에 '트럼프 모델'이라는 새로운 표현으로 북한 비핵화 협상의 불가측성과 모호성을 높이려 할 가능성도 있다.


비핵화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면 회담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다며 압박하는 북한, 

반발은 예상했다며 북한이 만남을 원치 않으면 그것 역시 괜찮다며 맞받아치는 미국.


두 정상이 6월초 싱가포르 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세기의 회담을 앞둔 북한과 미국 간의 살얼음판 밀당이 이제 본격 궤도에 올랐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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