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취소 발표였다. 이번엔 트윗이 아니라 공식 서한이었다. 


“친애하는 위원장에게. 

싱가포르 회담을 무척 고대했지만 최근 북한의 성명이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어서  이 시점에 회담을 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회담은 열리기 않게 됐음을 알려드립니다.”


한국시각으로 5월 24일 밤 11시쯤이었다.  


월드 클래스 포커 플레이어의 판 뒤집기였다.


①북한은 미국 정치를 몰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건 전날 발표된 북한 외무성 최선희 부상의 담화였다. 북한 최선희 부상은 리비아 식 핵폐기를 주장하는 펜스 부통령을 강하게 비난했다. 최근 북한 언론에서 보기 힘든 거친 언사들이 동원됐다.


최선희 부상의 담화 일부를 인용해 보면, 


“명색이 유일 초대국의 부통령이라면 세상 물정도 알고 대화 흐름도 알아야 할 텐데 횡설수설하며 주제넘게 놀아댔다. 미국 부통령의 입에서 이런 무지몽매한 소리가 나온 데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계관 부상이 볼턴 보좌관을 ‘사이비 우국지사’로 몰아세운 것 보다 단어의 강도가 더 세다. 


그런데 이번엔 상대를 잘못 택했다. 


펜스 부통령이 누구인가? 볼턴 보좌관은 말 그대로 백악관 참모에 불과하지만 펜스 부통령은 미국 권력 서열 2인자, 트럼프 대통령 유고시 미국을 책임져야 할 권력 승계 1순위이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의 막말 이미지를 상쇄시키기 위해 미국 공화당이 고민해서 삼고 초려한 부통령 아닌가! 그런 펜스 부통령을 막말로 몰아세우다니. 안 그래도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하는 걸 곱게 보지 않는 미 여론 주도층들은 이같은 북한에 행동에 상당히 불쾌했을 것이고 여론과 표심에 민감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이들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북한이 미국을 너무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김계관 부상이 볼턴을 몰아세운 건 북미회담 협상장에서 그를 배석시키지 말고 회담 협의에서도 배제하라는 신호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펜스는 도대체 왜 몰아세웠을까? 부통령이 정상회담에 참석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실익도 없는 북한 최선희 부상의 뜬금포가 회담 취소라는 엄청난 화를 부른 것이다.





② 접점 못 찾던 사전 협의, 취소 명분 제공한 ‘뜬금포’


하지만 북미간의 협의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면 북한 최선희의 비난 성명을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이 절묘하게 활용한 모양새가 보인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까지 나서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비핵화를 조금은 수용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했던 일괄 핵 포기에서 반 발짝 물러난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북한 비핵화를 단행하는 이른바 ‘신속한 비핵화(Rapid Denuclearization)이다. 하지만 북한이 앞세운 단계적 비핵화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는 느낌에 협상에서 밀린 것 아니냐는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이 핵 군축 운운하며 과거에 만든 핵무기는 조금은 오래 보유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도 미국으로선 마뜩찮았을 것이다. 


이 와중에 지난주로 예정됐던 사전 실무 회담에 북한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나타나지 않아 미국은 자신들이 바람 맞았다고 굉장히 불쾌해 했다. "북한에 수많은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비핵화 의제에서 다소 양보하는 듯한 모양새에 실무협의에서 북한이 심각한 신뢰 부족까지 드러내자 트럼프 대통령이 게임 판을 완전히 자기 쪽으로 당기기 위해 6.12 싱가포르 북미 회담 취소라는 극약 처방으로 북한에게 한 방 먹인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미국의 핵 능력은 너무 방대하고 강력해서 그것들이 사용되지 않기를 신께 기도한다는 으름장까지 내놓았다


③북한은 트럼프를 몰랐다. 북한은 미국을 몰랐다.





북한은 부랴부랴 다급해졌다. 뒤늦게 김정은 위원장의 위임을 받아 김계관 부상이 담화를 내고 읍소에 나섰다. 돌연 일방적으로 회담취소를 발표한 것은 북한으로서는 뜻밖의 일이며 매우 유감스럽다며 회담 개최를 강하게 요구했다.


담화 일부를 인용해 보자. 


“미국이 제시한 '트럼프 방식'이 문제 해결의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면 좋은 시작을 뗄 수 있을 것이라며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회담을 열어 달라고 매달리는 모양새로도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다.


북한은 어쨌든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혔다.


④ 월드 클래스의 판 휘어잡기 

회담 취소라는 강수를 전격 발표한 트럼프. 하지만 말미엔 또 다시 여지를 열어둔다


“북한이 마음을 바꾼다면 주저하지 말고 전화하거나 편지를 써주기 바랍니다. 북한은 평화와 번영과 부를 위한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참으로 슬픈 순간입니다.… 하지만 북한이 건설적인 대화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기다릴 겁니다. 예정됐던 회담이 열릴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 뒤에 열릴 수도 있습니다.”


자서전 '거래의 기술'에서 말한 '테이블에서 기꺼이 퇴장하는' 협상 전술이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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