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부인할 수 없는 월드 클래스다. 세계 최고 수준의 포커게임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판돈을 걸고 어느 한쪽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협상이 반전에 또 반전, 파격으로 이어졌다. 


‘롤러코스터 데이’ - 2018년 5월 26일의 이야기다.


① 트럼프, 24시간 만에 또 판 뒤집기


깜짝 카드는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선보였다. 


전날 북한 김계관 부상은 미국과 언제든지 마주 앉을 용의가 있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의중을 비교적 정중하게 전달했다. 북한 최선희 부상이 밝힌 ‘분노와 적개심’ 때문에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회담을 열 수 없게 됐다는 트럼프의 강수에 허를 찔린 북한이 8시간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북한 김계관 부상의 담화. 


트럼프 대통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화답하고 나왔다. 김계관의 발표가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라며 좋은 뉴스라고 예고편처럼 밝히더니, 회담 취소를 언급했던 자신의 말을 은근슬쩍 뒤집는다. 


한국시각으로 오전 6시 37분 날린 트윗으로 또 한 번 판을 뒤집은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한다면 싱가포르에서 다음 달 12일 열릴 것이다. 미국은 북한과 회담 재개에 대해 매우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필요하다면 회담 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담 취소 발표라는 초강수를 날린 뒤 언제 그랬느냐는 듯 회담 재개를 이야기하는 것은 트럼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깜짝 놀랄만하고 어질어질한 반전"이다. 그리고는 능청스럽게 기자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누구나 게임을 하는 것 아닌가.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세기의 회담’이라 불리는 북미회담이 단순히 ‘분노의 언어와 공손한 표현’ 때문에 깨질 뻔했다가 다시 정상궤도로 유턴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핵심 의제를 두고 북미간의 물밑 거래가 상당히 의견 접근을 봤기 때문에 다시 회담 재개를 논의한다고 판단하는 게 더 합리적일 것이다.


애초 미국과 북한은 일괄폐기 대 단계적-동시적 비핵화를 놓고 충돌했다. 트럼프는 ‘신속하고  압축적인 비핵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면서 북한의 단계적 방안을 일정 정도 수용했다. 북한은 풍계리 실험장 폐쇄라는 조치로 앞으로 핵무기를 더 만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상징적으로 전달했다. 비핵화의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건은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그러니까 이미 ‘만들어 놓은’ 핵무기의 폐기이다. 이른바 북한 과거 핵의 문제이다. 


북한은 ‘만들어 놓은 핵’은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폐기하기를 원한다. 미국이 어떤 대가를 줄지 또 그 대가를 끝까지 이행할지도 잘 모르고 덜컥 자신들의 마지막 카드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만들어 놓은 핵’을 먼저 폐기해 북한이 진정 비핵화의 의지가 있음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그래야 확실한 보상도 할 수 있다고 반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담 취소까지 갔다 다시 회담 재개로의 극적 유턴은 비핵화 방법론에 대한 양측의 계산이 어느 정도 접점을 찾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세라 샌더슨 백악관 대변인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대통령은 싸구려 정치 쇼(cheap political stunt)를 하려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지속 가능하며 실질적인 해법을 추구한다”


백악관은 회담 준비가 돼 있다고도 말했는데, 미국 백악관은 이번 주말 조 헤이긴 비서실 부실장을 필두로 선발대 30명이 싱가포르로 떠나 회담 준비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② 문재인,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가다





그런데,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고위험 고수익’ 방식으로 판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을 때, 이번엔 또 다른 게임 플레이어가 은밀하게 그러나 파격적으로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다.


2018년 5월 26일 오후 3시. 


극비리에 다섯 대의 차량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 멈춘다. 북한 김여정 부부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차에서 내리는 문재인 대통령을 환한 미소로 반긴다. 그리고 판문점 북측 통일각 내부에서 기다리던 김정은 북한 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환대한다.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첫 번째 만남 이후 한 달여 만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의 두 번째 판문점 회담이 열린 것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25일 오후 문 대통령에게 만남을 요청했고, 문 대통령이 이를 흔쾌히 수락하면서 성사된 회담이다. 트럼프의 회담 취소 발표라는 강수에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SOS를 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두산 사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남북 정상. 곧바로 2시간 가량 머리를 맞댔다. 트럼프가 북미회담취소 카드를 흔드는 속에 전격 이뤄진 문재인-김정은 두 번째 정상회담이기에 그만큼 한반도 정세가 긴박하고 논의해야 할 사안이 엄중하다는 걸 반영했다. 


핵심 의제가 비핵화 방안임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배석한 인물의 무게감도 그렇다. 서훈과 김영철, 두 사람은 남북관계나 북미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질 때면 물밑에서 입장을 조율해 난관을 타개해 나갔던 인물이다. 더구나 서훈 원장은 CIA 국장을 역임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연결시켜 ‘국정원-CIA-북 통일전선부’라는 삼각 채널을 만들어 현재의 북미 관계를 구축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남북 정상은 두 번째 만남에서 비핵화 방안을 놓고 대립했던 북미 협상을 타개하기 위해, 서로의 견해를 청취하고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면서 해결책을 찾는 데 주력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저는 지난주에 있었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를 결단하고 실천할 경우, 북한과의 적대관계 종식과 경제협력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다는 점을 전달하였습니다. 특히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모두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만큼 양측이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오해를 불식시키고, 정상회담에서 합의해야 할 의제에 대해 실무협상을 통해 충분한 사전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도 양측의 논의가 깊게 그리고 순조롭게 이뤄졌음을 시사했다. 


“북한 김정은 동지는 북미 관계 개선과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앞으로도 적극 협력 해 나가자고 말했으며, 양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했다. 김정은 동지와 문재인 대통령은 회담에서 논의된 문제들에 대하여 만족한 합의를 보았다."





이같은 합의는 서훈-김영철 라인이 밑그림을 그렸을 것이며, 미국 측에도 전달됐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끌려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진 북한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비핵화 방안을 놓고 미국과 합의하면 한국은 보증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북미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설득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2시간 회담을 마친 뒤 김정은 위원장은 러시아식으로 문재인 위원장을 세 차례 격하게 껴안았다. 김 위원장이 회담 결과에 무척 흡족했음을 방증하고 있다.


트럼프의 초강수에 취소 위기에 몰렸던 북미회담. 


이번엔 북한이 아예 북미회담 개최 날짜를 못 박고 나왔다. 더 이상 트럼프 주도의 포커게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북한식 반전 카드다. 그것도 자신들의 관영매체를 통해 회담 개최 날짜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김정은 동지는 6월 12일로 예정된 북미 수뇌 회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문재인 대통령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시면서 역사적인 북미 수뇌 회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피력하였다.” 


2018년 5월 26일을 전후해 펼쳐진 남-북-미 세 정상의 치열한 두뇌 싸움.


"악화하던 한반도 정세가 빠르게 정상궤도로 돌아오고 원래 분위기로 돌아온 것은 매우 신기하고, 의외의 일"이라며 "어떠한 것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행위다"라고 중국 언론은 평가했다.


하지만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완전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문 대통령의 말처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 앞으로도 많은 반전이 있을 것이다. 


그런 탓일까?

 

24시간 동안 일어난 우여곡절을 ‘대반전이자 호사다마’라고 표현한 중국 언론. 지켜보는 자신들도 조마조마했는지 눈이 어지러운 반전에 파격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중국인은 한반도 정세의 '롤러코스터'가 종점에 도착하기를 원한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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