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만이다.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1965년 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이후 북한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동남아시아 땅에 내렸다. 아버지 김정일도 1965년 김일성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으니 북한 지도자 3대가 모두 동남아 땅을 밟아 본 것이기도 하다.


2018년 6월 10일 오후 3시 36분. 싱가포르 창이 공항.


남색 인민복 차림에 굵은 뿔테 안경의 김정은 위원장이 에어 차이나 항공기에서 내렸다. 싱가포르 외무장관의 영접을 받았다. 외국 정상이 방문할 때 자국의 외교부 장관이 영접하는 국제사회의 의전 그대로였다. 

 

① 평양에서 항공기 3대가 뜬 까닭은?


김정은 위원장의 싱가포르행은 가히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6월 10일 이른 아침 평양에서 구 소련제 일류신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 비행기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송기였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5월 중국 다롄을 방문했을 때 이 비행기로 방탄 차량과 경호 물품을 실어 나른 사례가 있기에 김정은 위원장의 싱가포르 체류 때 필요한 물품을 실었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 추론이었다.


하지만 이후 2시간은 혼돈이었다. 


평양에서 중국 에어차이나 CA122편이 오전 8시 30분을 전후해 날아올랐다. 항로는 베이징 쪽이었다. 중국 고위직들이 주로 이용하는 보잉 747기였기에 김정은 위원장이 탔을 것으로 예상됐다. 단지 항로를 베이징쪽으로 잡았기에 혹시?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뿐이었다. 비행기는 베이징을 지나자 잠시 비행 레이더망에서 사라지더니 CA61편으로 이름을 바꿔 싱가포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비행기에 탔구나!


하지만 또 다른 변수가 등장했다. 한 시간 후인 오전 9시 30분. 평양에서 비행기 한 대가 날아 싱가포르 쪽으로 기수를 잡은 것이다. 비행 항로를 추적하는 레이더엔 항공기 이름인 편명조차 나와 있지 않았다. 단지 비행기의 종류가 구소련에서 만든 일류신 62라는 것만 확인됐다. 김정은 위원장의 전용기 참매 1호다. 


이후 평양발 두 비행기가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하는 오후 3시를 넘은 시각까지 김정은 위원장이 어느 비행기에 탔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오후 3시 36분. 김정은 위원장이 도착했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나오고 중국의 에어 차이나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김정은의 전용기가 노후 돼 안전에 문제가 있어서 중국 비행기를 이용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절반의 진실이다. 김정은 전용기도 아무런 문제 없이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했고 이 비행기에선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부부장이 내렸다. 


북한으로서는 북한 지도부가 총출동하는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 한 비행기에 모든 정부 요인이 타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김여정 부부장은 유사시를 대비해 자신들의 전용기인 참매 1호에 탑승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마치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이 한 비행기나 한 공간에 함께 있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혹시 모를 권력 공백을 막고 최소한의 정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위험 분산책이다. 그렇게 김정은 위원장은 007작전을 연상케 하는 첩보 비행으로 역사적 담판을 위한 싱가포르에 안전하게 내렸다. 자신들도 정상 국가들처럼 권력 공백 방지와 정부 기능 유지를 위한 안전판이 있다는 걸 세계에 과시하면서.


② 외국에서 중국 러시아가 아닌 국가 정상과 만나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철통 경호 40분. 김정은 위원장은 방탄 전용차 벤츠를 이용해 숙소인 세인트레지스 호텔에 도착했다. 3시간 가량 휴식을 취하더니 저녁 7시 반. 싱가포르 대통령궁인 이스타나 궁으로 향한다. 리셴룽 총리와의 회담을 위해서다. 


북한 지도자가 자국이 아닌 해외에서 다른 나라 정상을 만난 건 1984년 김일성 주석이 동독을 방문한 이후 34년 만이다. 동구권 국가와의 유대로 해외 순방을 자주 다닌 김일성 주석과는 달리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 러시아를 빼면 해외순방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저녁 7시 30분. 싱가포르 이스타나 궁.


싱가포르 정부는 김정은 위원장과 리셴룽 총리와의 만남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했다. 두 정상은 상대편에게 자국의 각료들을 소개하고,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여느 나라들의 정상회담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어진 환담. 두 정상이 앞에서 마주 앉고, 앞에는 자국의 각료들이 자연스럽게 배석했다.


김 위원장 :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훌륭한 조건을 제공해 주시고 편의를 제공해 주셔서 우리가 아무런 불편없이 왔습니다. 역사적인 북미 회담을 위해서 싱가포르 정부가 자기 집안일처럼 성심성의를 제공해 주고 편의를 도모해 줘서 이제 북미 수뇌 상봉이 성과적으로 진행되게 됐는데 싱가포르 정부의 노력이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셴룽 총리 :

싱가포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북미 회담을 하기로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반도의 정세 발전을 지켜봐 왔습니다. 동시에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도록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꼭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기원합니다.


두 정상의 회담은 약 30분 만에 끝났다. 하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김정은 위원장 일행을 위한 만찬은 따로 제공하지 않았다. 싱가포르가 북한과의 회담을 하는 게 아닌데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도착하지 않은 만큼, 장소제공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침 이른 시각 출발부터 싱가포르 도착 이후 일정까지, 김정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밤 9시 22분 싱가포르 파야 레바르 공군기지.  


또 다른 주인공인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세기의 담판, 역사적 회담에 대좌할 두 정상이 모두 싱가포르에 내렸다. ‘세기의 빅딜’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말 그대로 트럼프 대 김정은, 북미 양측의 진검 승부만 남았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저작권자 © 피처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