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오후 3시 9분 북한 조선 중앙 TV.


북한 1호 아나운서 리춘희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조미관계의 새 역사를 개척한 세기적 만남”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사상 첫 정상회담을 기록한 42분짜리 기록영화, 다큐멘터리다. 김 위원장의 평양 출발부터 싱가포르 체류와 정상회담, 그리고 귀환까지 6월 10일부터 13일까지의 여정을 자세하게 담고 있다. 


김 위원장 평양 출발 모습에선 ‘철천지 원수’인 미국의 최고 수뇌와 만나 체제 보장과 안전을 담보하게 될 역사적 회담을 갖게 된 터라 감격에 겨워 눈물을 보이는 당 간부도 보였다. 


하지만 더 인상적인 장면은 김 위원장의 6월 11일 밤 2시간 동안 진행된 싱가포르 깜짝 시찰이다. 북한 방송은 당시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싱가포르의 야경과 발전상을 가감 없이 북한 내부 주민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싱가포르 야경에서 무엇을 봤을까? 북 주민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2018년 6월 11일 밤 9시 4분. 싱가포르 세인트레지스 호텔. 


인민복 차림의 김정은 위원장이 깜짝 외출에 나섰다. 동생인 김여정 당 부부장은 물론 리수용 당 부위원장, 김창선 부장, 리용호 외무상, 노광철 인민무력상 등도 합류했다.


‘깜짝 외출’ 첫 방문지는 유명 관광지 마리나 베이 샌즈의 식물원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축구장 141개 크기와 맞먹는 101만㎡ 규모의 매립지에 조성된 초대형 식물원으로 도시를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싱가포르 정부의 계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곳에서 싱가포르 각료들과 셀카를 찍기도 했다.  


북한이 방송한 기록영화는 이곳을 이렇게 소개한다.


“싱가포르의 자랑인 이 화초원은 마리나만 주변에 간석지를 개간해 만든 화초원으로서 싱가포르에서 자라지 않는 식물들을 위주로 하여 잘해오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온실들 중 하나입니다.”


이어 방문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스카이 파크.





57층 규모 건물 3개가 거대한 배 모양의 스카이파크(Sky Park)를 떠받치고 있는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호텔 꼭대기에 있는 스카이파크는 축구장 면적 2배인 1만 2천㎡의 '공중 정원'으로, 싱가포르의 스카이라인을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 약 300미터인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옆으로 눕힌 것보다 길고 A380 점보제트 여객기 4, 5대를 놓을 수 있다고 싱가포르는 자랑하고 있다.


북한 방송도 이곳을 찾은 김 위원장 일행 동선을 보도하면서 싱가포르 야경을 화면 가득 담아 북한 주민들에게 그대로 보여줬다. 북한 보도에서 인용한 김 위원장 소감도 예사롭지 않다.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싱가포르가 듣던 그대로 건물마다 특색이 있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귀국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들을 많이 배우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최고령도자 동지께서는 또 도시형성 전망계획에 대한 해설도 들으시었습니다.” 


김 위원장 싱가포르 참관의 백미는 싱가포르 항구일 것이다. 


북한 방송은 김 위원장 싱가포르 항구 참관기를 이렇게 보도한다.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싱가포르항도 참관하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분망한 항구로 이름 날리고 있는 싱가포르항. 세계의 530개 항로가 지나가는 항로이며 700여개의 항구와 연결되어 있는 이 항구는 화물취급능력에서 세계적 수준의 큰 항구입니다.” 


싱가포르의 발전한 경제상을 전달한 것인데, 그래도 여기까지는 말 그대로 팩트(Fact)의 전달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김 위원장의 말은 싱가포르 방문의 또 다른 목적을 느끼게 한다.

 

“최고영도자 동지께서는 항구 지역이 하나의 큰 도시를 방불케 한다고 오늘 참관을 통하여 싱가포르의 경제적 잠재력과 발전상을 잘 알게 되었다고 하시며 이번에 싱가포르에 대한 훌륭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김 위원장 일행의 싱가포르 깜짝 시찰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 위원장 스스로 “싱가포르의 경제적 잠재력과 발전상을 알게 되었고, 훌륭한 지식과 경험들을 배우려 한다.”고 밝힌 점도 주목되지만 북한에서 법보다 위에 있는,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는 최고 영도자의 말이  북한 주민들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싱가포르는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로 세계적인 성공을 이룬 도시국가이다. 싱가포르 1인당 국내총생산은 6만 1700여 달러로 세계 10위다. 남한 3만 달러보다 거의 2배다. 또 국부 리콴유 총리에 이어 아들 리센룽 총리로 이어지며 2대가 권력을 세습하며 통치하고 있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제 개발에 성공한 싱가포르가 매력적인 참고 모델이 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핵 경제 병진 노선에서 ‘경제총력 노선’으로 이미 국가 지도노선을 전환한 상태다. 북한 각지에 20여개의 경제 특구를 지정해 개발과 외자 유치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 위원장이 예정에 없던 깜짝 시찰을 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보도한 것은 ‘경제 건설 총력’을 선포한 김정은의 개발 의지와 경제 발전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싱가포르 일간지 스트레이츠타임스도 “싱가포르 자본주의의 결실을 탐색하러 김정은 일행이 야간 외출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물론 싱가포르는 인구 약 580만명의 도시 국가로, 인구 2천만의 북한에 싱가포르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정말 북한 개발을 위한 로드맵을 구상하고 있는 걸까?


중국 정부의 의지가 담겨있는 관영 매체 글로벌 타임스의 조언이 눈길을 끈다.


"덩샤오핑의 1978년 싱가포르 방문 때 중국은 오늘날의 북한처럼 상대적으로 폐쇄된 국가였다. 덩 전 주석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싱가포르 모델은 중국의 외국 자본과 산업화 추구에 필수적 역할을 했고, 중국이 싱가포르에서 배운 핵심 교훈은 개방 정책이었다"


 "북한이 경제발전을 우선하기로 했는데 개방은 전진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선택이다. 북한 정부가 싱가포르 모델을 따라 개방정책을 취한다면 아시아의 산업구조에 곧 편입돼 경제도약을 이룰 것이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저작권자 © 피처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