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디어 만난다는 기대. 평생의 기다림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왔다, 왔어.” 자리 잡은 북측 가족들이 나지막히 숨소리를 내뱉고, 입구에선 허리 숙인 발걸음들이 일련번호가 적힌 테이블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세기 가슴에 뭉친 한 덩어리를 토해낸다. 피붙이를 부둥켜안았고 흐느꼈고 또 울부짖었다.


“어머니, 왜 이제 왔어요?”

“15살 너만 두고 흥남부두를 떠나던 때를 지금껏 잊은 적이 없다” 

“오빠 보고 싶었어요” 

“내가 죄인이요….”


그리던 어머니를, 오빠를, 아내를 50여년 만에 만난 상봉장은 삽시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혈육을 만난 이산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눈물을 훔치며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 뷰 파인더 반대쪽 눈이 벌겋게 충혈된 카메라 기자, 흐느낌에 손이 떨려 50년 만에 토해내는 한풀이를 겨우 받아 적는 취재기자…그 순간엔 남과 북이 따로 없었고 모두가 하나로 만났다. 호텔 직원들도, 북측 안내원들도 연신 손수건을 적시고 있었다. 





2000년 8월 15일 오후 4시 45분. 굵은 비가 내리는 평양 고려호텔 3층 상봉장은 그렇게 역사 속에 기록됐다. 


3박 4일 동안 평양에서 진행된 꿈같은 만남. 평양이 고향인 강성덕 할머니는 75살인 북측 언니 강순덕 할머니에게 남쪽에서 가져온 신발을 직접 신겨주며 행복하다고 했다. 8월 17일이 언니 생일인데, 평생 첫 생일 선물을 했다며 웃다가도, 94년 세상을 등진 어머니가 임종 때 북측 순덕 언니를 무척 찾았다는 말을 전할 땐 굵은 눈물이 두 자매의 얼굴 깊은 주름 사이로 파고들었다. 치매에 걸려 3일 내내 남편을 몰라봤던 최경길 할아버지 부인은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거짓말처럼 의식을 찾아 회한의 눈물을 흘렸고, “가지 말고 함께 살자”며 울부짖으며 매달리는 여동생과 딸에게 김성옥 할머니는 “내가 죄인이다. 통일되면 만나자. 그때까지 죽지 말고”라는 말만 되뇌며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버렸다. 


그렇게 이별을 위한 만남, 작별 상봉이라는 형용모순 속에 남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 이산가족들은 차창 밖 피붙이를 뒤로한 채 순안공항으로 향했다. 통일돼서 꼭 다시 만나자는 허망한 약속들만 남긴 채…


18년 뒤인 2018년 8월 하순. 또 다른 이산가족들이 금강산을 눈물로 물들였다. 


"상철아", "어머니". "애들은 몇이나 뒀니. 아들은 있니" 


전쟁 통에 생이별한 아들. 7살 천진난만했던 아들도 이제 칠순을 넘긴 나이. 백발의 아들을 구순 노모가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65년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89살 유관식 할아버지의 사연은 더 기구했다. 부인과 헤어졌을 때 임신사실도 몰랐던 유 할아버지는 북측의 딸 67살 연옥 씨를 난생 처음 만났다. 아내를 찾으려다 태중에서 이별한 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이산가족들의 사연과 상봉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비극이다. 파킨슨병으로 움직이기도 힘든 할아버지가 조카들에게 한 줄 한 줄 편지를 썼고, 오세영 시인은 북녘 사촌 누이에게 ‘사랑하는 동생’이라는 시 한수로 절절한 혈육의 정을 표현했다. 





2박 3일간의 상봉 행사는 속절없이 지나가고, 이별을 위한 만남은 그렇게 끝나간다. 허망함에 서로 주소를 적어주기도 하고, 가족들의 생일과 제삿날을 알려주기도 하면서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 아닌 약속을 되풀이 하는 이산가족들. 


"오빠, 울지 마. 울면 안 돼…"

"죽기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밥도 먹고 그래. "

"내가 차 가지고 가면 40분이면 가"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100세 시대니까 오래 살고, 서로 다시 만나자"


그렇게 또 다시 2018년 8월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마무리 됐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눈물바다. 2~3일 비극적 만남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철썩 같이 믿으며 피붙이와 또 이별했다. 소설 같은 만남이지만, 그리고 68년 만의 만남이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이산가족들은 애써 외면했다. 


지난 18년 동안 20여 차례 열렸던 이산가족 상봉. 그때마다 남과 북 100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대측 가족을 만났다. 그때마다 절절한 사연과 기구한 운명이 언론에 보도됐다. 2000년 이후 약 19,800여명의 남과 북 이산가족들이 혈육과 상봉했다. 남북 당국의 합의로 열린 상봉행사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북측 이산가족들과 만나기를 희망하며 정부당국에 등록한 이산가족들은 모두 13만 2천 여명. 하지만 7만 6천 여명은 이미 세상을 등졌고, 현재 5만 6천여 명이 생존해 있다. 생존자 중에는 80대가 41.2%, 90세 이상이 21.4%를 차지한다. 이미 확인했듯이 부부나 형제 자매 상봉은 줄어들고 있다. 찾는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 그 가족의 자녀나 사촌, 오촌 등 가족이라기보다 친인척과 만나는 일이 많아지는 추세다. 그만큼 이산가족들이 나날이 고령화하고 있는 것다.


그래서 언론들은 이산가족 상봉 규모의 확대, 상봉 정례화, 상시 방문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남북 당국에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언론들도 상봉 정례화니 상설 면회니 하는 그런 대안 제시는 지난 18년 동안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면 늘 되풀이해왔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18년 동안 외쳤지만 성사되지 않았다면 이제는 다른 대안을 더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북한 비핵화라는 난제에 얽혀 남북관계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살얼음판이고 보면 더욱 더 그렇다. 




 

남북 두 정상이, 남북 당국이 의지를 갖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해법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필요하다면 이산가족들의 비극을 가장 세속적인 방법인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발상을 가져야 한다. 과거 분단된 독일에서 정치범 석방에 사용되었던 프라이 카우프(옛 서독의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사업으로, 동독에 돈을 주고 정치범을 데려온 방식을 말함)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도 이런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북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1990년대 이후, 당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금력 등을 동원해 북측 이산가족들을 제 3국에서 만난 이산가족들도 3400여명쯤 된다. 


더 이상 체제와 이념 때문에 피붙이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생사를 안다고 해도 만나지 못하고, 또 설령 천우신조로 만났다 하더라도 또 다시 혈육을 두고 돌아서는 생이별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평양에서 형님을 만나고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칠순의 할아버지가 마음 깊은 곳에서 내뱉은 말 한마디는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 비수 같은 말이 가슴에 박힌 지도 벌써 18년이 흘렀다.


“기자 양반들은 상봉행사 취재가 이제 모두 끝난 모양이군. 나는 평생의 한을 이번에 풀었지만... 이제 형님을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은 채 남은 여생을 살아야 해.”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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