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하루 전이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8월24일 북한을 곧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차 방북이 될 이번 평양행에는 새로 임명된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도 동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포드 자동차 부회장인 비건 대표는 한때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될 정도로 미국 공화당 내에서는 외교 안보 정책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미 의회에서 대북 관련 업무도 많이 경험했다.  


비건 부회장을 대북정책 특별 대표로 임명하고 평양에 동행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북미간의 핵 리스트 제출과 종전 선언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이번 방북이 교착 상태를 풀 돌파구가 되리라는 기대와 거물급 대북 특별 대표의 임명으로 대북 비핵화 협상에 미국이 더 집중적으로 나서겠다는 의미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트윗이었다. 방북 계획 발표 불과 하루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이오의 방북을 전격 취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측면에서 충분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폼페이오 장관에게 이번에는 북한에 가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방북해 봤자 얻을 게 없다는 판단에 따른 전격적인 발표였다. 미국 내 대북 정책 핵심 인사들이 이 결정에 참여했고 트위터 발표문 조율에 폼페이오 장관도 참여한 걸 보면 미국이 방북을 하루 만에 취소할 만큼 중대한 상황 변화가 있었다는 걸 반증한다.


① “편지로 띄운 분위기 편지로 가라앉혔다“


이번 전격 취소 발표 배경에는 북한 김영철 부위원장의 편지가 있었다는 미 언론들의 보도가 잇따랐다. 워싱턴 포스트는 김영철 부위원장의 메시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방북 취소를 결정할 만큼 적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CNN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북한 김영철 부위원장이 보낸 극비서한에는 “비핵화 협상이 다시 위기에 처할 수 있으며 무산 혹은 결딴 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Denuclearization talks are again at stake and may fall apart” 


지난 5월말 커다란 흰색 봉투에 담긴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한 김영철 부위원장. 그가 공개리에 전달한 커다란 흰색 친서가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면 이번 극비 서한으로 북-미간 비핵화 협상을 난관에 봉착시킨 것이다.





김영철 편지에는 이런 표현도 등장한다고 한다.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향한 조치를 취하는 데 북한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협상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타협이 이뤄지지 않고 초기 협상이 어그러진다면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재개할 수도 있다”


북한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조치를 했는데 미국이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지나치게 압박만 한다며 불만일 수도 있다. 교착 상태인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북한식의 으름장 외교를 구사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을 향한 북한의 으름장 외교, 협박성 언어 사용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 경우를 종종 목도해 왔다. 더구나 이번 북한식 표현은 2000년대 초반 2차 북한 핵위기를 불러온 그때의 말들과 뉘앙스가 비슷해 불길하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찾는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등으로 촉발된 북-미 간 위기 국면을 해소할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의혹을 새롭게 제기하면서 집요하게 추궁했고, 이에 북한 강석주 부상이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발끈해서 내뱉은 한마디.


"북한은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고,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


미국은 이 발언을 근거로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을 시인했다며 강경 대응에 나섰고 북핵 2차 위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북한이 뒤늦게 “자신들도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원칙적 입장을 천명한 것”이라며 “핵개발은 부시 행정부의 날조설”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쏟아진 물이었고 천기누설, 천하의 기밀은 이미 새어나간 뒤였다. 


북한은 이후 다시 한 번 으름장 외교를 구사한다. 2003년 4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미중 3자 회담 당시 북한 리근 대표가 켈리 미국 대표를 회담장 복도에서 만나 빠른 어조로 준비해 간 메모를 읽는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험하거나, 이용하든가 수출하든가 그것은 미국의 다음 행보에 달렸다" 


이 발언은 곧 이어질 본격 협상에서 북한이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를 지닌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북미 양자 협상 대비용 사전 발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발언은 곧바로 북한의 핵보유 선언으로 이해됐고, 당시 미국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보낸 편지의 구체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전후 맥락이 어떠한 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협상 국면에서, 서로에 대한 불신이 여전한 상태에서 이런 저런 위협용 언사, 으름장 외교를 구사하는 건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걸 북한이 알아야 할 것 같다. 미 언론이 폼페이오의 방북 취소가 "교착된 협상에 대한 좌절감의 첫 공개적 신호"라며 “핵 위협은 끝났다고 말해 온 트럼프 대통령의 ‘극적인 톤의 변화’"라고 보도하는 걸 보면 더욱더 그렇다. 


② “미중 무역 전쟁 때문에…” 북-중 갈라치기


그러나 트럼프가 지난 5월에도 북미 정상회담 ‘취소카드’를 사용한 적이 있어 이번 폼페이오 방북 취소가 일종의 협상 전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를 발표하면서 중국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북한을 압박하면서 한편으로는 더 큰 상대,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이다. 북한 비핵화에 충분한 진전이 없다며 폼페이오 방북을 취소한 트럼프. 그러면서 동시에 중국을 겨냥했다.


"게다가 중국과의 훨씬 더 강경한 교역 입장 때문에 그들 중국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 폼페이오의 방북을 중국과의 무역 전쟁과 연계시켰다.


"폼페이오 장관은 아마 중국과의 무역 관계가 해결된 이후 가까운 장래에 북한에 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기대하는 이는 많지 않다. 따라서 중국이, 또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해 (미국이 보기에) 의미 있는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폼페이오가 가까운 시일 안에 평양을 가는 건 힘들어 보인다.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는 9월 9일 전후로 예상되는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북을 겨냥해 꺼내든 노골적인 옐로카드다. 중국 최고 지도자들이 방북을 하게 되면 대규모 경제지원이 뒤따랐다. 2005년 10월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북·중 관계 발전 4원칙을 천명했다. 고위층 상호 방문 전통 지속, 양국 교류 확대, 무역 협력을 통한 공동 발전 모색, 협력을 통한 공동이익 추구 등이다. 이를 통해 북·중 관계를 실질을 도모하는 차원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북한이 2차 핵 실험을 단행한 지 불과 다섯 달 만인 2009년 10월에는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평양을 찾아 대규모 지원을 약속하고 경협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과거 사례를 볼 때 트럼프 입장에서는 시진핑 방북으로 이뤄질 대북 지원으로 자칫 국제사회의 제재 효과가 반감되는 것이 결코 탐탁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폼페이오 방북 취소는 무역 전쟁이라는 중국의 아픈 고리를 파고들면서, 비핵화 협상에 있어서 북한에 대한 중국 영향력을 차단하고, 대북 경제지원을 매개로 한 북-중 밀착을 견제하려는 ‘트럼프 식 갈라치기 전술’로 볼 수 있다. 오바마 시절 백악관 선임보좌관 에반 메데이로스는 “미-중 무역 전쟁과 비핵화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사안”이라며 트럼프의 폼페이오 방북 취소 카드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지렛대를 동시에 강화하려는 전형적인 몸부림”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때리면서도 북한에 대해선 달래기를 시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안부를 전하고 싶다”고 친밀감을 표시하기도 하고 “곧 만나길 고대하고 있다”는 부드러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내가 중국 때문에 힘드니, 중국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미국과의 대화에 더 적극 나서라는 일종의 구밀복검(口蜜腹劍:'입으로는 달콤함을 말하나 뱃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친절하나 마음속은 음흉한 것)인 셈이다.


‘폼페이오 곧 방북’에서 ‘하루 만에 취소’라는 롤러코스터로 북미 비핵화 협상은 다시 분수령을 맞았다. 매티스 국방장관은 북한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한미 군사훈련 재개카드로 북한의 아킬레스건을 정조준하며 압박에 가세했다.


북핵 리스트 제출과 북한 핵의 60% 선폐기라는 요구까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고 이에 맞선 북한이 종전선언과 제재 해제는 물론 평화체제라는 최종 요구까지 거론했다는 정황이고 보면 북한 핵 협상은 말 그대로 아슬아슬 살얼음판이다. 여기에 무역문제를 놓고 충돌하는 G-2간의 패권 다툼까지 주요 변수로 끼어들면서, 한반도 게임판은 더욱더 복잡하고 중층적인 고차 방정식으로 빠져드는 양상이다. 얽히고 설킨 북핵 함수를 풀기 위해서는 빅딜을 넘어선 더 대담한 타협이 필요하거나, 빅뱅에 버금가는 창조적인 방식이 동원돼야 하지 않을까, 고르디아스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저작권자 © 피처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