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9일 오전 평양 김일성 광장. 


커다란 함성소리와 함께 북한을 대표하는 각 군대들이 빼곡히 도열해 있다. 이윽고 열병식 행진이 시작됐고 하늘엔 북한 AN-2 저속 침투기들이 '70'이라는 숫자를 그리는 축하 비행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북한식 표현대로 열병종대들의 행진에 이어 각종 무기들이 선을 보였다. 


신형 152㎜ 자주포와 KN-09 300㎜ 신형 방사포 등이 선을 보이더니 불새-3 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전차로켓 탑재 신형 장갑차 8대, 신형 대함미사일 6대 등이 북한 당정군의 주요 인사와 초청된 인사들이 서 있는 귀빈석, 이른바 주석단 앞으로 지나가고 ‘북한판 패트리엇'으로 알려진 유도미사일 KN-06, 번개 5호 6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김정은 위원장은 김일성광장을 지나는 열병부대에게 경례를 붙이며 격려했다. 


선보인 무기들은 이게 다였다. 





외신 기자들이 혹시나 해서 기다리던 대형 ICBM이나 새로운 전략 무기는 열병식에 등장하지 않았고, 군악대 행진으로 열병식 순서는 넘어갔다. 북한이 말하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창건 70돌을 맞아 거행된 열병식과 평양시 군중시위의 모습이다. 


정권수립 70년 기념 연설을 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외부세력의 온갖 침략 위협을 근원적으로 종식시키려는 당의 결단과 정력적인 활동에 의해 공화국은 최강의 국가 방위력을 갖춘 군사 강국으로 진화하였다”고 강조했지만 핵이나 핵무력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 경제 건설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사회주의 위업이 새로운 단계에 올라선 역사의 분수령에서 노동당은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자는 전략적 노선을 제시했다. 당원과 근로자들은 자력갱생정신과 과학기술의 위력으로 사회주의의 전면적 부흥을 위한 경제건설 대진군을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하겠습니다.”


앞서 열린 정권 수립 70돌 경축 중앙보고대회에서도 김영남은 “나라의 전략적 지위가 최상의 경지로 올라서고 전면적 부흥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경제 건설 대진군을 다그치자”고 강조한 바 있다. 


평소 큰 행사나 주요 문건에 ‘핵무력은 통일조선의 보검’이라고 강조하던 북한의 주장은 이날사라졌다. 전가의 보도처럼 강조하던 핵 무력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전면적 부흥을 위한 경제 건설’이라는 새로운 구호가 등장한 것이다. 


북한 스스로 핵 개발로 ‘전략적 지위’라는 걸 획득했고 이제는 경제 건설을 목표로 설정했기에 핵이라는 단어와 전략무기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교착상태에 빠진 미국과의 협상을 의식한 의도적인 몸 낮추기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핵 무력도 안보이고 ICBM도 등장하지 않은 열병식은 북미 회담 재개를 위한 러브콜이라는 평가인 것이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도 “북한이 처음으로 핵무기를 강조하지 않은 열병식을 했다”면서 “신뢰의 표시”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백악관은 그러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친서를 보내 왔으며, 이를 위해 양국이 일정을 조율중이라고 밝혔다.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핵 협상을 다시 탑다운 방식으로 돌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과 북한 핵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 NBC 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훈훈한 트윗은 잊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이 6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핵 활동을 계속해 왔으며 올해 5~8개 가량의 핵무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미국 관리 3명의 발언을 인용해 보도하고 있다. 랜드 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도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거나 해체한 것은 없고, 5개에서 9개의 새로운 핵무기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이 핵을 동결하지도, 비핵화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핵 무기화'를 해온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미국 내에선 이같은 불신이 여전하고 북미간의 힘겨루기가 여전한 상황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 서열 3위 리잔수 상무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은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공동 인식을 견지하며 이를 위한 조처를 했다"며 미국도 이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핵 실험장 폭파 폐쇄등의 조치를 취했기에 미국의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러시아 마트비옌코 상원 의장에겐 보다 구체적으로 이제는 미국이 답할 차례라는 입장을 밝혔다. 마트비옌코 의장은 "북한은 상호 조치에 응할 준비가 돼 있지만 상응하는 반응이 없이는 어떤 일방적 행보도 취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설명한 것이다. 북한이 자신들의 조치에 대한 응답으로 미국으로부터 제재 완화와 같은 단계적이며 동시적 행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핵 실험장 폐쇄라는 선의를 보였으니 이제 미국이 답하라는 북한.

북한의 조치는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조치로 이해하며 핵 리스트 제출을 재촉하는 미국.

연내 종전선언을 이끌어 내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정착시키려는 한국.


9월에 예정된 평양 남북 정상회담과 뉴욕 유엔 총회를 계기로 열릴 한미 정상회담, 그리고 가시권에 들어온 북미 2차 정상회담. 하지만 북한과 미국 사이에 70년 동안 켜켜히 쌓인 불신의 벽이 조금이라도 없어지지 않으면 회담의 획기적인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북한 창건 70년이라는 큰 이벤트에 ICBM이라는 전략 무기를 제외시키고, 핵무력이라는 단어조차 없애버린 북한이 이참에 한 번 더 통 크게 나가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각종 문건에 명시된 핵보유국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는 것이다.


북한은 당 규약과 헌법에서 핵보유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주민들이 생활 지침으로 여겨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 10대 원칙’ 서문에도 핵보유국이라고 적혀있다. 각종 법령과 주요 문건에 적시한 핵보유국이라는 문구를 삭제하면서 북한이 자신들의 비핵화 의지를 과시한다면, 미국에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게 조금 더 유리해 지지 않을까? 


어차피 종전선언도 북한식 표현대로 정치적 의지의 표현일진대, 북한도 각종 문건에 적시된 핵보유국이라는 문구를 삭제해 비핵화 의지를 표현한다면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에 신뢰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다. 물론 미국은 주는 것도 없는데 북한만 손해볼 수 없다는 북한 내부의 반발이 예상되기는 한다. 하지만 정말로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각종 문건에서 ‘핵보유국’ 넉 자를 지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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