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정치권에 소문난 대식가다.


그는 2012년 8월 한 언론인터뷰에서 “하루 세끼 매번 밥을 두 그릇 정도 먹는다. (체력은) 밥심 덕분”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는 올해 10월에는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먹방’을 찍기도 했다.


밥심을 중요시하는 손 대표가 6일부터 국회 로텐더홀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손 대표의 요구사항은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선거제도 변경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손 대표는 1947년생으로 올해 71세다. 고령 때문에 단식을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다. 손 대표도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고민을 밝혔다.


“많은 분이 별안간 단식은 위험하다. 후유증도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선 단식을 그대로 (밀고) 가겠다. 물만 먹고 필요하면 손가락에 소금 좀 찍어 먹고 견디겠다.”


손 대표가 “단식을 안 하고 싶다”면서도 단식이라는 승부수를 띄운 건 그의 정치적 소신 관철과 당내 상황 등이 얽혀있다. 손 대표는 다당제 신봉자다. 그러기 위해선 선거제도 변경이 필수다. 현행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는 양당 구도를 고착시킨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진단이다.


특히 당내에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단식 이야기가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10월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등을 내걸고 13일간 단식투쟁을 했고, 실제로 지방선거 실시라는 성과물을 끌어냈다. 장진영 바른미래당 전 최고위원은 이날 당 규탄대회에 참석해 “손 대표께서 그 역사적인 교훈을 새기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2016년 10월 정계 복귀한 후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개헌 등을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과제로 꼽아왔다. 손 대표는 이날 자신을 찾아온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에게 “혹시라도 민주당과 청와대, 그리고 자유한국당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이도 들고 힘도 없지만 내 목숨 하나 바쳐서 (선거제를) 좀 바꿔보자고 해서 여기에 나왔다”고 말했다.


당 대표라는 측면에선 구심점이 약화된 당을 안정시킬 기회다. 현재 바른미래당은 이학재 의원 등 과거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의 한국당 복당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바른미래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는 2020년 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푸념이 당내엔 적지 않다.


이와 관련, 바른미래당 한 의원은 “연동형이든 권역별이든 선거제가 바뀌면 민주당과 한국당 외 제3세력도 생존 가능성도 커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다만 손 대표의 단식이 얼마나 성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현재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이 요구하고 있는 예산안과 선거제도 연계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이견이 나와서다. 이날 오전 서울대에서 특강을 한 유승민 전 대표는 “손 대표 단식은 국회 가서 찾아뵙고 만류할 생각”이라며 “선거제와 예산안 연계 문제에 대해 (저는) 예산안은 예산안대로 심의하는 게 맞지 않느냐 생각한다”고 말했다. 선거제 개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많지 않다는 점도 고민이다.


이에 대해 손 대표는 “단식을 할 때는 그저 죽겠다는 각오로 단식해야지 혹시 적당히 어느 선에서 물러나서 빠져나가는 게 출구전략이라면, 나는 출구전략이 없다”고 말했다.


정국의 뜨거운 이슈도 아님에도 손 대표가 단식까지 강행하는 것에는 속사정이 있다. 바른정당이 손 대표 취임 이후에도 지지율이 지지부진하고 이학재 의원 등의 탈당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손 대표로서는 당의 기강을 단식을 통해 바로잡고자 하는 의중이 있다.


여기에다 예전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을 통해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잡았던 경우 등을 자신의 입지와 대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차기 주자로 더욱 부각되기 위해선 '단식'은 하나의 통과의례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단식을 한 적이 있었다. 손 대표도 단식을 통해 미미한 야당 총수에서 야권 전체의 지도자로 점프하려는 의지도 있는 듯보인다.


하지만 예전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의 뜬금없는 단식이 국민들의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정치적 이벤트쯤으로 보여주기 식 단식은 자신의 몸도 망가지고 국민들도 외면할 수 있다. 손 대표는 적당한 시기에 출구전략을 마련해 단식을 종료하고 내년 총선 대비 새 인물 영입에 집중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손 대표 단식 첫날 '김정은 위원장의 방남 뉴스가 발표될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는가. 손 대표가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날에는 더 큰 일이 터져 그 결단이 묻혀버린다는 이른바 '손학규 징크스'를 소재로 우스갯소리가 나온 것이다.



▲ 손학규 민심대장정 마무리 기자회견(2006년 10월 9일)



'손학규 징크스'의 시작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 대표는 2006년 7월 경기도지사 임기를 마친 뒤 호남지역을 시작으로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섰는데, 하필이면 대장정 마지막 날인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대장정 소식은 단숨에 묻혀버리게 된다.


2007년 1월에는 그 해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미래 국가 생존 전략으로 '21세기 광개토전략'을 야심 차게 공개했지만, 곧바로 범여권 대선주자 중 지지도가 가장 높았던 고건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이 정치권을 강타하면서 손 위원장의 전략 발표 소식은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다.


민주당 대표 시절인 2010년 11월 22일에는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 사찰에 대한 국정조사와 특검 도입을 요구하면서 서울광장에서 철야 천막 농성에 들어갔는데, 이튿날인 23일 북한이 초유의 연평도 포격 도발을 벌이면서 농성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국회로 복귀하게 된다.



▲ 손학규 전남 강진 칩거 마무리(2016년 10월 20일)



2016년 10월에는 "만덕산이 이제 내려가라고 한다"면서 2년 2개월의 칩거 생활을 접고 전남 강진 토담집을 떠나 정계 복귀와 더불어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는데, 며칠도 안 돼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꼽히는 '최순실 게이트'가 정계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면서 역시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지난해 2월에는 국민의당 입당을 선언한 당일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에 구속되고, 지난해 3월 7일 첫 대선 공약을 발표한 날에는 주한미군이 사드 발사대 반입을 시작으로 배치 작업에 전격 착수하면서, "이쯤 되면 '손학규 징크스'는 '우연'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우스갯소리가지 돌기도 했다.


'손학규 징크스'는 올해 5월 국회의원 재보궐 출마 선언 직후 터진 북미정상회담 취소 사태로 화룡점정을 찍은 바 있다. 손 대표는 지난 5월 2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러분의 간곡한 요청으로 지방선거를 살리기 위해 제가 죽는다는 심정으로 나설 뜻을 냈으나, 당이 혼란과 분열 위기로 치달아 생각을 접는다"면서 전날 밝혔던 서울 송파을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 의사를 철회했다.


하지만 이번에 손 대표가 단식을 선언한 날에는 별다른 정치 돌발변수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단식이 더욱 주목받은 것도 아니다. 이날 김정은 위원장의 방남 발표가 있었다면 그야말로 손학규 징크스의 화룡정점이 될 뻔했다. 애처로운 것은, 아무런 변수가 생기지 않아 손학규 징크스 뉴스마저 나오지 않았고 그의 단식도 그렇게 무관심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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