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자유한국당의 ‘우향우’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자유한국당은 극우에서부터 우익, 중도우파, 중도까지 이르는 다양한 이념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이중 ‘태극기 세력’이라 일컫는 극우가 예상 밖으로 커진 모양새다. 자유한국당 주류에서는 선거 초반 태극기 세력의 부상에 대해 일과성 ‘돌출현상’으로 치부하려 했다.


하지만 전국합동연설회와 TV토론을 거치면서 부딪친 뜻밖의 현상에 벌써부터 놀라고 있다. 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이번 전당대회 결과를 앞두고 캠프 내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입을 닫고 있지만 태극기 세력과 연관된 후보들의 지지도가 예상 외로 높게 나오고 있음을 암시했다. 김진태 후보와 김순례 후보는 전대에 앞서 5·18 망언 논란에 휩싸였다. 당내 캠프 주변에서는 태극기 세력의 부각이라는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진짜로 놀랄 일은 아마 2월 27일 전당대회 결과가 발표된 후에 일어날 수도 있다. 단지 여론조사에 불과했던 예측이 이날에는 눈앞의 현실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마치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당초 전대에 들어가기 전 예상은 황교안 후보와 오세훈 후보의 맞대결이었다. 황 후보는 우익을, 오 후보는 중도우파를 각각 대표하고 있다. 양자대결 구도에서 김진태 후보는 약세로 점쳐졌다. 김 후보는 태극기 세력을 대표하는 극우로 분류할 수 있다.


태극기 세력은 적게는 3000명에서 많게는 1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태극기 세력 내부에서 자유한국당 책임당원으로 등록해 한국당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 등록한 당원들이다. 38만명에 이르는 선거인단 중 기껏해야 38분의 1일 뿐이다. 2017년 7월 전당대회에서 투표율은 25%였다. 이때는 모바일 투표가 처음 도입됐다.


마찬가지로 이번 전대의 투표율을 25%로 보고, 태극기 세력이 모두 투표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9만5000명 중 최대 1만명에 불과할 뿐이다. 숫자가 가진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전대는 38만명의 선거인단 투표(70%)와 일반 여론조사(30%)로 결정된다. 태극기 세력 쪽에서 봤을 때 여론조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리하다. 그래서 전대 초반 태극기 세력의 변수는 당내에서는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당내에서 크게 본 변수는 ‘친박 논란’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치소에서 유일하게 접견하는 유영하 변호사가 황 후보를 비판하면서 황 후보의 ‘친박 논란’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황 후보의 우세로 기울어졌다. 친박의 한 의원은 “이상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황 후보와 오 후보의 접전을 생각했는데, 내부 분위기가 황 후보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간 것이다. 유 변호사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친박의 지지는 황 후보로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 큰 변수로 생각했던 ‘친박 논란’이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고, 아주 작은 변수로 생각했던 ‘태극기 세력’이 예상보다 큰 변수로 떠올랐다.


합동연설회장에서 태극기 세력은 김 후보를 연호했고, 당 지도부나 다른 후보의 연설에는 비난의 목소리를 터뜨렸다. 연설 중단에 이르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에 부응해 연단에서는 태극기 세력과 관련이 있는 후보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 같은 사태에 대해 김무성 전 대표나 이완구 전 원내대표 같은 중진들은 우려의 목소리도 냈다.


한 의원 측은 “32만명이라는 책임당원이 있지만 이들 역시 당협위원장이 가까운 지인을 억지로 끌어들인 사람들”이라면서 “이런 취약성 때문에 태극기 세력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휘둘리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 인사는 “태극기 세력이라는 것은 극우라고도 할 수 없다”면서 “단지 박 전 대통령 개인의 맹목적인 지지 내지는 충성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바른미래당의 한 의원은 태극기 세력의 전당대회 ‘난동’에 대해 “정치를 희화화하는, 아주 심각한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소수의 움직임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자유한국당의 전대는 오른쪽으로 휘어진 국면이다. 우익에 해당하는 황 후보가 대세를 장악했다. 오히려 중도우파 후보와 극우 후보가 2위를 놓고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시사저널>이 2월 11∼13일 서던포스트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나 <아시아투데이>가 2월 15∼17일 알앤써치에 의뢰해 벌인 여론조사에서도 이 같은 조짐이 엿보이고 있다. 당내 캠프의 여론조사도 이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 친박 의원은 “유영하 변호사의 발언 때문에 오히려 황 후보가 친박의 강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비박 측의 지원까지 받는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면서 “황 후보에게서 빠져나간 친박 표보다 황 후보에게 붙는 표가 더 많아졌다는 분석도 있다”고 말했다. 황 후보에게서 빠져나간 표 대부분은 김 후보에게 가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의원은 “어차피 황 후보가 우세하다고 하면 굳이 한 표를 황 후보에게 던지느니 김 후보에게 던지겠다고 하는 책임당원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당초 당내에서는 태극기 세력의 힘이 커지면 김 후보가 황 후보의 표를 갉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오 후보에게 유리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비박의 결집이 약해진 원인으로는 오 후보의 ‘갈팡질팡 행보’가 꼽힌다. 당초 오 후보는 전대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으나 후보에 등록했다.


비박 쪽의 한 인사는 “지도부가 친박 쪽의 목소리를 수용하면서 비박 쪽에서는 아예 친박 두 후보가 그냥 둘이서 전대를 하고 ‘너희들끼리 잘해봐라’는 방향으로 생각했다”면서 “그런데 오 후보가 후보에 등록하면서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비박 내부에서 오 후보에 대한 불신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대에서 오 후보의 미미한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한국당 내부에서 중도우파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당 선거인단 중 태극기 세력은 잘해야 1만명이지만 태극기 세력에 공감을 표하는 우익의 기반도 어느 정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5·18 민주화 운동, 박 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우익의 목소리가 당내에서 커졌다. 대세에 올라탄 황 후보는 2월 19일 토론회에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고 답변했다. 20일 TV토론회에서는 “헌재의 결정은 존중한다”고 한 걸음 물러섰지만 자유한국당의 축은 전당대회를 계기로 급격하게 우측으로 기울고 있다. 친박 의원 역시 이런 분위기에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이 의원은 “이렇게 분위기가 확 쏠릴 수 있나”라면서 “전대가 아니라 전대 이후를 걱정하는 의원들이 많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이 이처럼 급격하게 우향우로 쏠리는 듯하게 보이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박근혜 탄핵 이후 당내의 보수성향 당원 대의원들을 흡수할 만한 친박 대체세력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주 원인이다. 이명박 정권 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당내의 친이세력은 많이 위축된 것이 사실이다. 이미 우경화 조짐이 박근혜 대통령 집권 시절 보였다. 그런데 탄핵으로 친박세력의 좌표가 어정쩡해지면서 그 대안세력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는 결국 태극기부대로 보수성향 일부 세력이 옮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동인'에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도 불을 지피고 있다. 이것이 두번째 이유다. 현재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최저임금제 등의 정책 난맥상에다 '내로남불' 식의 적폐청산이 반감과 정권 혐오증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도 정책적으로는 태극기부대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감정적으로는 태극기부대와 많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의 이유로 자유한국당의 분위기는 대체로 우경화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고, 태극기부대의 전위부대적인 활동이 가세해 일종의 상승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당대회 이후다. 황교안 후보 체제가 들어선다면 다분히 태극기부대를 의식한 행보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자유한국당의 총선 필패를 부를 것이다. 총선 전 황교안 체제가 물러나고 또 다른 비대위 체제가 들어설 수도 있다. 이러는 사이 제 1야당의 집권세력 견제 역할은 더더욱 멀어질 것이다. 이것이 과연 국가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민주당은 속으로 웃고 있겠지만 결국 국가이익에 반하는 일이 된다. 박근혜 탄핵 후유증의 긴 그림자가 아직도 정치 전반을 짙은 암흑 속으로 몰고가고 있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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