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참, 살다보니 이재민이 되는 날도 다 있네!" 


지난 6일 강원 고성 천진초등학교 이재민 대피소에서 박순배 씨(80)는 안부를 묻는 주변의 전화에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몸이 불편한 아내의 요양을 위해 10년 전 서울에서 고성 토성면으로 거처를 옮겨 마음 놓고 살아왔지만 하룻밤 새 온 동네를 휩쓴 화마에 집이 전소되면서 이제 갈 곳을 잃은 처량한 신세가 됐다. 


산불 당시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에 들고나온 물건이라고는 차 열쇠밖에 없었다. 박씨는 "타는 냄새가 너무 심해 집 밖으로 나왔는데 이장이 대피하라고 방송하니까 일단 마을을 빠져나와야겠다 싶어 운전대를 잡았다"며 "설마 집까지 타겠나 싶어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나왔는데 불이 잡히고 다시 가보니 재밖에 없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박씨는 "강풍에 불똥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니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산불이야 연중 행사처럼 나는 거니까 특별할 게 없다 생각했는데 그날 따라 바람이 워낙 셌다"며 "하천 주변에 깔려 있던 갈대가 불바람에 휩쓸리면서 주변 집들까지 재로 만들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날 천진초에는 박씨 가족을 비롯해 137명이 간이 주거시설 51개동을 나눠 쓰고 있었다. 보금자리를 잃은 지역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인근 아야진초등학교에도 대피소가 마련됐지만 예상보다 많은 이재민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박씨는 다른 피해자들보다 조금 먼저 온 덕에 몸을 누일 곳은 구했지만 자리가 없어 돌아서는 이웃들을 보며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원봉사자 김 모씨(46)는 "대피소 공간이 좁아 임시 숙소가 제한적으로 설치되다 보니 자리를 못 구한 사람들은 다른 곳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친척이나 지인에게 신세를 지거나 차에서 잠을 자고 식사만 대피소에서 해결하는 분들이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모씨(42)는 "독거노인 분들이 많은데 대피소에서 심리적으로 답답함을 호소하신다"며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재산 피해가 심각해 앞으로 생활을 걱정하시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고성에 비해 민가 피해가 적었던 속초는 수련 시설 등 자체 운영 시설에 이재민 수용 공간을 마련했다. 속초시청소년수련원 2층에 한 호실을 제공받은 송경아 씨(52)는 "남편이 몸이 아파 저희 가족이 따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며 감사를 표했다. 이재민을 위한 자원봉사들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구호단체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이재민 돕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서울 중랑구에 사는 최동희 씨(30)는 이날 구호물품이 든 가방을 메고 속초를 찾았다. 산불 피해의 심각성을 인지한 뒤 당장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재민들에게 나눠줄 속옷 등 생필품을 챙겨 무작정 속초로 달려왔다. 최씨는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를 잡고 가져온 옷가지와 속옷, 양말 등을 나눠줬다. 생필품을 건네받은 이재민들은 금세 눈물을 보였다. 최씨는 "막연하게 속옷이나 여성 위생용품 등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고 가방에 넣어왔다"며 "비록 크지는 않지만 피해 주민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재민이 대부분 고령자라는 점에서 의료지원팀도 가동됐다. 강원대병원 응급재난지원팀은 천진초와 아야진초에 간이 진료실을 설치하고 불편을 겪고 있는 이재민을 치료하고 약품을 나눠줬다. 천인국 강원대병원 진료지원실장은 "천진초에서는 30여 명이 다녀가셨는데 다행히 응급으로 진료가 필요한 분은 많지 않았다"며 "화재 때 발생한 연기로 답답함을 호소하는 분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서 모씨(78)는 "집에 약을 두고와 걱정했는데 당분간 먹을 수 있는 약을 주셔서 걱정을 덜었다"고 안도했다. 


전국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면서 주말 내내 산불 피해 지역에는 구호물품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속초시 주민생활지원과 관계자는 "전국 각지에서 응원 메시지와 함께 도움의 손길이 답지하고 있다"면서도 "맨몸으로 집을 뛰쳐나와 갈 곳이 없는 분들에겐 아직도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부족한 상태"라고 전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이웃돕기 모금 계좌와 구호물품을 보낼 주소를 정리한 글이 공유되기도 했다. 


최수정 기자 soojung@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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