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통령의 아들로 살아온 굴곡진 인생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은 194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별한 전부인 차용애 여사 사이의 장남이다.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도 차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3남인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만 이희호 여사가 낳았다.


서울 대신고와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김 전 의원은 대통령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74년 8월 15일 김구 선생의 경호실장 윤경빈씨의 딸 혜라씨와 결혼했지만 마흔이 넘도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모진 고문을 받아 장애를 얻기도 했다. 1971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선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1980년 다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안전기획부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때 후유증으로 허리와 목을 다쳤다.





이후 김 전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남 목포‧신안갑에서 당선된 후 17대 국회까지 내리 3선을 했다. 그러나 재선 의원 시절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이 발병했고 비례대표였던 3선 시절엔 미국을 수차례 오가며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의정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김 전 의원은 안상태 나라종합금융으로부터 인사청탁과 함께 1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2006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추징금 1억5000만원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특별사면 됐지만 공식 석상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8월 18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며 분향하고 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빈소를 찾은 모습이 언론에 포착됐다. 병세가 짙어진 김 전 의원은 몰라보게 수척해졌으며 휠체어를 탄 채 힘겹게 조문객을 맞았다. 현역 시절 아버지를 연상케 했던 풍채를 기억했던 대중과 지인들은 쇠약해진 김 전 의원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이때가 공식석상에서는 마지막이었다.


2001년 9월 펴낸 자신의 자서전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에는 대통령 아들로서 겪어야 했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자서전에는 “대통령의 아들은 무덤에 갈 때까지 무엇을 하며 살란 말인가. 바보처럼 살다가 실업자라도 좋다는 배필을 만나 아버지가 주는 생활비로 평생 살다가 죽으란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아직 ‘대통령의 아들’은 영광보다는 ‘멍에’다”라고 썼다.


한편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김 전 의원은 20일 오후 4시17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쓰러졌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이 김 전 의원을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날 오후 5시4분에 숨졌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킨슨병이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슬하에 세 딸이 있으며 빈소는 신촌세브란스 병원 특 1호실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 별세에 대해 “우리 세대가 겪었던 ‘야만의 시대’를 다시 돌아본다”고 글을 남겼다.


조국 민정수석은 21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시대는 변화했지만 그 변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남겨진 상흔은 깊다”고 추모했다. 이어 조 수석은 “‘독재’란 단어가 진정 무엇을 뜻하는 지도 돌아본다. 그리고 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 그 ‘독재’를 옹호·찬양했던 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린다”며 “현재와 같은 정치적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사라졌던가”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기억의 힘’을 믿는다”며 “삼가 고인의 영면과 명복을 빈다. 그곳에서 아버님과 함께 화평(和平)의 술 한 잔을 나누시길”이라 쓰며 글을 마무리했다.


한국정치에서 대통령의 아들 신분은 조선시대 왕정체제의 구습이 남아있어서인지 언제나 주목과 경계의 대상이었다. 때로는 아들이 아버지의 권세를 업고 2인자 행세를 했고, 때로는 아버지의 권세에 눌려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홍일 의원은 정치인으로서는 해박한 식견과 통찰력으로 '김대중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홍일의 죽음으로 구시대의 정치도 막이 내렸다. 김홍일의 죽음은 한국 정치가 구습에서 벗어나 시스템과 규범에 의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신정치로 나가는 새로운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임석우 기자 rainstone@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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