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별관을 재건축하고 본관을 리모델링하는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100여년 만의 최대 변신이라고 합니다. 1912년 일제가 건설한 구관(현 화폐박물관)에서 출발한 한은 본점은 1932ㆍ1964년에 지어진 1ㆍ2별관과 소공별관, 1987년 준공된 지상 16층ㆍ지하 3층 규모의 본관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국가보안시설임에도 주변에 고층건물이 많이 들어서 안전성과 보안성이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자 이번에 대대적인 개보수에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최장 4년이 넘을 걸로 예상되는 공사기간에 지하금고에 들어있는 돈과 1천명이 넘는 본점 인력을 어떻게 재배치할지 목하 고민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행 하면 바로 돈이 생각나죠. 화폐가 그리 유통되기 전에는 당연히 금이 주요 거래수단이었죠. 일명 금(지)본위제라고 하는데요, 중앙은행이 금화 대신 금화의 가치와 같은 가치의 지폐와 보조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은행 본점 리모델링 계획이 발표되면서 세간에서는 한국은행이 한때 보관했던 금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군요. 한국은행과 그에 얽힌 금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일제에 의해 근대화를 맞게 된 한국은 금에도 애환이 서려 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이후 대한제국은 중앙은행 설립과 화폐조례 제정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일본에 의해 무산됐죠. 최초의 중앙은행 제도인 대한제국특립제일은행과 발권제도인 화폐조례가 1901년 마련됐고 당시 세계적 추세였던 금본위제를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금이 많이 매장돼 있음에도 서양 열강에 광산을 비롯한 각종 이권이 넘어갔기 때문에 금이 부족한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차관으로 금을 조달하려고 했고 성사직전까지 갔지만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3년에 만든 중앙은행조례와 금본위제 기반의 태환금권조례는 다음해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화폐정리사업으로 무산되었습니다. 나라의 곳간이 텅 비어 있으니 독립이니 자강이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죠. 물론 그 핵심인 금을 일본이 대거 약탈해가면서 일어난 비극이었죠.



그 뒤 1909년 대한제국의 한국은행이 설립됐지만 곧 이은 경술국치로 2년 만에 행명이 조선은행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당시 조선은행권은 금화와 지금은(地金銀), 일본은행권을 기반으로 발행됐으며 발행한도도 일본의 인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실 금 생산량만 보자면, 조선도 일본처럼 금본위제도를 실시하기에 무리가 없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1920년대까지 일본 대장성 조폐국이 매년 조선에서 가져간 금의 양은 일본에서 수집한 금의 양과 비슷할 만큼 생산량이 많았던 것이죠. 조선은행은 국내에서 생산된 금을 매입하여 오사카의 조폐국으로 보내고, 그 금액만큼을 일본은행권 또는 예금으로 받아 유통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유통된 화폐 가치가 일본과 평등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그토록 강조하던 ‘내선일체’는 화폐문제에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죠. 일본은행권은 조선과 대만에서 정금(正金)과 똑같이 취급되고 유통되었지만, 그 반대방향은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금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죠. 영국과 함께 금본위제도를 고수한 인도와 달리, 껍데기만 남은 식민지 조선은 금본위제도의 변방이자 이단으로 불릴 만했습니다.



자, 이쯤 되니 6.25 직전 한국은행에 쌓여있던 그 금괴들의 슬픈 역사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조선 금은 일본으로 공출되고 최소한의 금만이 남아있었던 게 해방 이후 한국은행의 곳간 실정이었죠. 또한 금에 비해 화폐가치가 떨어지다보니 금을 많이 보유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런데 근대적 한국은행 설립도 당시의 어수선했던 상황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이뤄졌습니다.


자료조사를 좀 해보니 오늘의 한국은행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중앙은행법 초안이 마련되어 정부.국회 및 미경제협조처(ECA) 건의로부터 탄생했다고 합니다. 당시 재무부가 이 중앙은행법 초안을 기초로 재정금융위원회를 설치하여 정부안으로 작성한 것이죠. 그러나 미비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논리로 1949년 6월 미국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 전문가 파견을 요청하여 1950년 2월에야 중앙은행 개편안을 확정, 정부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곧이어 정부가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 상정하여 통과된 후 5월에 공포하여 6월 12일부터 업무를 개시했습니다. 6.25 발발 바로 2주전이었습니다.


문상철 전 한국은행 부총재는 한은의 산 증인으로 불렸는데, 그가 지난 2005년 한 인터뷰에서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이 있느냐 없느냐는 전쟁 수행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6.25 전쟁 직전 한은의 출범은 국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앙은행은 전쟁시 화폐수급은 물론 금융기능의 회복과 유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서울 본점의 화폐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은행권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같은 해 5월에 개설된 한국은행 도쿄지점의 주도로 처음으로 ‘한국은행권’을 일본에서 만들었습니다. 일본 점령 미군사령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도쿄지점에 지시한 후 2주일 만인 7월 13일에 새로 만든 한국은행권을 진해로 수송해 왔으니까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습니다.”


1950년 7월 22일 처음 발행된 1000원 한국은행권. 전쟁중에 급하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행 발행 최초의 한국은행권인 100원권과 1000원권이 일본에서 인쇄돼 미군 군용기로 수송, 1950년 7월 22일 처음으로 발행했습니다. 당시 한국은행에 보관중이던 화폐를 전란중에 미처 가져올 틈이 없어 이렇게 부랴부랴 다시 일본에서 찍어냈던 게 현재 유통되는 한국은행권의 효시였던 셈이죠(일부에서는 '북한군이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약탈했던 조선은행권 화폐를 남발하여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한국은행권을 발행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은 금고에 화폐와 같이 있던 금괴는 상당부분 가져갔습니다. 아무래도 ‘금’이라서 그랬겠죠? 이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6.25가 나자 설립 2주밖에 안된 한국은행은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6.25 당일은 일요일이라 구용서 총재 등은 종묘행사를 참관하고 최순주 재무부장관은 상공.농림장관 및 ECA 처장 등과 제주도를 시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민군 남침 급보에 놀라 낮 11시에 경무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주재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고 미국 대사관에서는 각종 문서 소각작업을 벌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일은 휴일이었지만 전쟁소식에 예금인출사태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은행에는 전비를 조달할 국고금 관리에 초비상이 걸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금도 전비조달 자금으로 상당히 중요했죠. 군과의 협조아래 지금은(地金銀) 긴급반출이 위급한 숙제로 떠올랐습니다. 전쟁 이틀 뒤인 6월 27일, 국방부 제3국장인 김일환 대령이 금괴반출을 협의 독려하게 됩니다. 곧이어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송요찬 헌병사령관에게 지시하여 헌병대 20명이 트럭을 몰고 한국은행으로 향합니다. 이렇게 해서 금 1,070kg과 은 2,500kg은 무사히 진해 해군 창고로 옮겨왔지만, 금 나머지 260kg(223kg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음)과 은 16,000kg은 미처 옮기지 못했고 그것이 서울을 장악한 북한군 수중에 들어간 것입니다.


6.25 발발 3일만에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은 한국은행의 남겨진 금괴도 가져갔다는 설이 있다.


이때의 급박했던 상황을 증언해주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료 조사결과 한국 해군사관학교 1기생인 정규섭 전 해군 제독이 이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해군의 살아 있는 역사인 그는 병참지원과 군사외교란 방식을 통해 6.25 전쟁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자칫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었던 한국은행 지하실의 금괴와 지폐, 국립경주박물관의 보물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수송한 주역이 바로 그였습니다.


“6월25일 이른 아침이었어요. 당직 장교가 비상소집 전화를 했어요. 황급히 출근하니 공산군이 남침을 했답니다. 바로 맡은 바 임무를 챙기기 시작했지요.”
당시 그는 해군소령으로 국방부에 파견돼 제3국(관리국) 제1과 선임장교로 과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3국은 육해공군의 예산집행과 군수 병참 지원 업무를 맡은 중요한 부서였죠. 전황은 시시각각 불리해졌고,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막연함과 불안감이 국방부를 뒤덮었습니다.


6.25 전쟁 초기 끊어진 한강철교.


6월27일 아침, 훗날 국방장관과 상공장관을 지낸 김일환 국방부 3국장이 그를 부르게 됩니다. 금괴 긴급반출 임무를 맡은 김 국장과 함께 한국은행으로 가보니 최순주 재무장관과 구용서 총재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은행 지하실에는 국가 재산인 지폐와 금괴, 은괴가 보관 중이었죠. 이들은 이 중요한 전란자금을 어떻게 안전하게 옮기는가를 논의했다고 합니다. 북한군이 수도 서울 바로 코앞에 와 있었을 때였죠.


“한국은행의 금괴와 은괴는 약 4톤으로 모두 89개 상자에 나눠 포장했어요. 이를 헌병사령부가 보내온 GMC 트럭 2대에 실었지요. 소총으로 경무장한 헌병 1개 소대를 호위시켜 진해로 후송했습니다.”
다음 날 서울은 인민군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루만 늦었으면 대한민국의 전 재산이 인민군에 넘어갔을 뻔했던 순간이었죠. 당시 한은의 상황도 긴박했죠. 문상철 전 한국은행 부총재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구용서 당시 총재가 6월 27일 오후 3시에 임원과 부국장들은 일단 한강 이남으로 넘어가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본점에는 장기영 조사부장, 신병현 과장과 서무과장인 나, 3명이 남기로 했어요(이 인력들이 금괴 긴급반출을 끝까지 도운 것으로 보입니다). 27일 자정이 넘어 북한군의 총소리가 들린 직후 출발, 28일 새벽 2시 좀 넘어서 한강을 간신히 건넜습니다. 2시 30분쯤에 다리(한강철교)가 폭파됐으니까 거의 몇 분 전이었지요.”

이렇게 옮겨온 금.은괴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경주박물관의 국보와 함께 미국으로 일단 이송했다고 합니다. 한국은행 금은 150만 달러, 경주박물관 국보는 100만 달러의 보험에 가입하여 미국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금은 뉴욕의 연방준비위에 보관했다가 뒷날 IBRD와 IMF 가입시 출자금으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금괴 모두를 가져오지 못하고 남았던 것이 지금도 한국사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대구 동화사 금괴 소동이 바로 그것인데요, 지난 2008년 12월 탈북한 새터민 김모(45)씨가 동화사 대웅전 뒤뜰에 금괴 40㎏이 묻혀 있다며 2011년 12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동화사에 발굴 협조 요청을 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실 북한군이 가져갔다고 전해지는 금괴는 그 이후 행방을 다룬 기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북한군 일부가 그 금괴를 북한으로 가져가지 않고, 낙동강 전선에서 밀린 뒤 퇴각 과정에서 대구 동화사나 그 이외 지역에 탈취한 금괴 일부를 묻어두고 후퇴했다는 ‘그럴싸한’ 이야기로 말입니다. 실제로 김 씨는 자신의 양아버지가 인민군이었는데, 한국은행에서 금괴를 가지고 나와서 가지고 다니다가 후퇴 명령이 내려져서 동화사에 묻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김씨는 동화사측과 발굴을 위한 협의를 가졌고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돼 있는 관계로 문화재청에 금괴 굴착을 위한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지난 2012년 1월 13일 신청했습니다.



이에 문화재청은 4차례의 심의 끝에 2012년 6월 21일 조건부 가결(문화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화사 측과 합의한 뒤 발굴) 결정을 내리면서 진실 확인 가능성에 무게가 실려 세간에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금괴가 발굴될 경우 소유권을 두고 김씨와 동화사측이 절충점을 찾지 못한데다 “일방적인 주장(소문)때문에 문화재 보전 지역을 마구잡이로 파헤칠 경우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잇따를 수 있다”는 등의 우려가 제기되면서 발굴작업이 난항을 겪었죠. 여기에 한국은행도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약탈당한 금의 일부일 수 있다”며 발굴작업을 할 경우 입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국정원, 경찰청 등도 발굴 작업에 부담을 느끼면서 ‘금괴 소동’의 진실 확인 작업은 멀어져만 갔습니다. 이 후 김씨는 금괴 발굴시 불교 재단에 기부의 뜻을 밝히며 재차 확인을 주장했지만 동화사측은 금괴의 유무를 떠나 김씨의 적정한 책임을 요구하면서 협의가 무산됐고 문화재청은 조건부 가결에 필요한 조건 미이행으로 허가 자체가 무산됐습니다. 이렇게 김씨의 보물찾기는 허무한 해프닝으로 씁쓸하게 일단락됐죠.  


한편 미국으로 옮겼던 한은 금괴는 그 뒤 한은 대구지점에 쌓아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모든 금괴를 영국 런던 영란은행으로 옮겨둔 상태입니다. 왜 우리나라 금을 통째로 영국이 보관하고 있을까요. 영국은 세계 최고의 활성화된 금 선물 시장이 있습니다. 이 선물시장에서는 실제 금 현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에 보관하고 있다가 급변하는 시세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옮겨가자니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영국의 영란은행에 보관한다고 합니다. 통상적으로 현금은 은행에 맡기면 이자라도 주는데 그러면 금은 맡겨놓으면 이자를 줄까요? 아니면 금고 보관료를 지불해야 할까요? 정답은 보관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어서 나오는 질문이 있겠죠? 보관료까지 지불해가면서 영국에 보관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죠.


영화 <다이하드3>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이끄는 악당들이 뉴욕 연방준비은행 금 저장고를 터는 장면.


금 현물은 마냥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간혹 시세 차익을 노리는 공매도 투자자(제련, 광산업자 등에게 단기간 대여)가 있을 수 있는데 이들에게 일정 비용을 받고 단기간 빌려주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관료가 발생하긴 하지만 또 어느 정도의 수익이 발생하는 상황이니 손해볼 게 없다는 뜻이죠. 웃기는 게, 금은 금고에 그대로 있는데 소유주가 잠시 왔다 갔다 하는 셈이죠. 그 과정에서 대여료와 보관료가 교차하고요. 한은은 자신들이 보유한 금으로 얻는 수익과 영란은행에 보관하는 수수료의 정확한 내역은 공개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대여수수료는 워낙 미미한 수준이라 금으로 ‘적자’를 보진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은행이 영란은행에 위탁 보관하고 있는 금괴는 순도 99.5%에 무게는 400트로이온스(12.5㎏) 규격을 따른다고 합니다. 약 8320개의 금괴로 쌓여있는데, 104.4톤(세계 34위)입니다. 가장 많은 금을 쌓아놓은 나라는 미국인데 한국은행보다 80배 많은 8133.5톤을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금이 많은 독일(3381톤)과의 격차도 상당하군요. 3위는 국제통화기금(IMF:2814톤)이고, 이탈리아가 2451.8톤으로 4위, 프랑스가 2435.5톤으로 5위다. 이어 중국(1722.5톤), 러시아(1370톤), 스위스(1040톤), 일본(765.2톤), 네덜란드(612.5톤) 등의 순으로 금부자 국가입니다.


과거 10톤 정도의 금을 보유했던 한국은행은 지난 2011년 금 40톤을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30톤, 2013년 20톤을 매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는 추가 매입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현재 외환 보유액 가운데 금의 비중은 1.3% 수준입니다.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은 여전히 논란거리입니다. 전 세계 중앙은행이 외환보유액의 10%가량을 금으로 보유한 데 비해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행은 금을 많이 보유한다는 것이 리스크라는 입장입니다. 금값의 변동폭이 커서 투자 위험이 따르고 유동화가 어려운데다 금 보유에 따른 이자가 없어 기회비용이 크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영국은 세계적인 금 선물시장이 들어서 있다. 멀리 런던 템즈강의 타워브리지가 보인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이런 한국은행의 입장에 우려를 표시하기도 합니다. 금 보유량은 외환보유액과 함께 한 나라가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안전판’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요동치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금보유량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매년 국회 국정감사에선 한은의 금 보유량이 너무 적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금 같은 실물자산으로 외부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를 마련해둬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6.25 전란 때 고작 1톤의 금괴수송작전이 성공한 게 어찌보면 지금 대한민국 곳간의 모태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100배의 금을 보유하고 있지만 세계 15위의 경제규모를 생각해볼 때 여전히 부족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제 그 금이 모두 영국에 있어서 전쟁이 나도 부랴부랴 옮길 일은 없어졌지만, 심리적인 피난처를 생각한다면 금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닐까요? 어찌됐든, 금이니까요^^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저작권자 © 피처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