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일동안 달리던 탄핵열차가 멈췄다. 종착역은 박근혜 대통령역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직무정지 92일만에 탄핵 인용 결정에 따라 전관예우가 거의 없는 전직 대통령으로 전락했다. 청와대 일부 참모들은 내심 4435 정도의 기각까지 기대했다고 한다. 민심과는 큰 온도차다. 국가의 최고급 정보가 모이고, 엘리트 전략가들이 모인 곳 치고는 전략적으로 큰 판단 착오를 한 것이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은 아직 어디로 갈 것인지도 정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은 서울 삼성동 사저로 이사 갈 준비를 전혀 안했을 정도로 헌재의 판단에 기대를 걸었을 수도 있다. 청와대 내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너무 큰 일을 당해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까지 이뤄지리라고는 현실적으로 예상을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거의 모든 것을 잃은 탄핵보다 좀 더 나은 결정은 없었을까. 청와대같은 전략의 최고 컨트롤타워같은 곳에서는 모든 시나리오를 탁상 위에 올려놓고 면밀하게 유.불리를 따진다. 참모들은 항상 이런 시나리오 수립에 익숙해 있다. 실제로 청와대에서 일해 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청와대의 정무적 전략 수립 체계는 입체적이고 면밀하다라고 말한다. 청와대가 최악을 피하고 전략적으로 차악을 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당할 바에야 차라리 하야를 택해 정치적 타협을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오너의 의중이 중요했을 것이다. 모든 시나리오를 검토 대상에 올려놓고 참모들이 건의했겠지만 결국 결정은 박 전 대통령의 몫이다. 바로 여기에 탄핵이라는 큰 돌덩이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나는 그렇게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처음부터 일관되게, 바보처럼 우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청와대 최고 전략가들이 만든 정교한 선택지들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최순실이라는 선택 과정의 한 날개를 잃음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상황 판단을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현재 청와대의 고급 정무라인이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박 전 대통령에게도 익숙치 않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 박 전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은 제로에 가깝다.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한다면 위기는 피할 수 없다. 물론 최순실의 할아버지가 박 전 대통령 곁에 있었어도 탄핵같은 최악의 순간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심각했고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들의 눈은 문재인 전 대표에게로 향하고 있다.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그는 굳건하게 35%대를 유지하고 있고, 등락을 하던 안희정 이재명을 저만치 떨쳐내고 독주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권력 1호는 문재인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모두들 탄핵 인용 뒤 문재인의 표정을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표정관리가 중요했다. 문재인은 탄핵 결정이 난 뒤인 12시경 자택에서 나왔다. 얼굴은 굳어 있었고, “제 입장은 박광온 캠프 수석대변인을 통해 이미 밝혔다. (오늘 발언은) 그렇게 양해해 달라고만 밝혔다. 그리고 비공개 일정으로 조용히 팽목항으로 향했다. 조기대선의 첫 일정이 세월호였던 것이다. 철저히 계산된 행보로 보인다. 어떤 대국민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 그만큼 문재인은 포스트 박근혜 체제의 급부상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측근의 입에서 나온 멘트는 대선과 미래를 향한 메시지가 읽힌다.

문 전 대표 본인이 감당해 나갈 새로운 대한민국의 희망과 마주하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담아 팽목항행을 결정한 것으로 안다.”

조기대선에 대한 사실상의 출사표다. 문재인은 팽목항에서 1박을 한 뒤 다음날에는 광주를 방문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조기대선의 첫 출발지를 호남으로 선택한 것이다. 팽목항은 미래, 호남방문은 지지층 결집이라는 두 개의 날개로 대선열차의 기적을 울린 셈이다.


현재로서는 문재인 대세론은 강고한 편이다. 310일 발표된 갤럽 지지율 조사에서도 문재인은 지지율 32%1위를 지켰다. 대세론이 뒤집어지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짧아 대형변수가 출현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게 강고한 대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조기 대선으로 선거운동 기간이 짧은데다 문재인의 독주체제가 이미 상당히 굳어졌다는 것이다. 문재인은 지난 10주간 여러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해왔다. 더구나 그가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등 민주당 후보를 꺾고 민주당 경선 후보로 확정된다면, 그들의 지지율 중 상당수를 흡수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게 비문진영의 분위기다. 문재인의 대세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반사이익을 거의 그대로 전부 흡수한 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문재인이 대선주자 지지도 1위로 올라선 시점(11월 첫째주)은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이 본격화된 시점과 일치한다. 대부분의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문 전 대표의 대세론은 국정농단 정국에서 형성된 후,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굳어졌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역대 대선에서 상대후보의 반사이익으로 승리한 예는 거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 정도가 야권의 지리멸렬 반사이익을 본 정도였을 뿐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P 연합이라는 적극적인 공세 전략,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효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중도층을 아우르는 포용전략이 작용했다. 문재인으로서도 자기만의 한방이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선 야권연대가 가장 확실한 카드다. 하지만 반 개헌 정서에서 드러났듯이 문재인은 독식을 선호한다. 강한 대세론을 업고 있기 때문에 굳이 연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동안 침묵하던 보수층의 결집과 중도층의 선택도 중요하다. ‘보수후보는 물구나무를 서도 20%는 얻는다는 게 대선판의 통설이다. 여기에 반 문재인 정서를 가진 중도층 세력이 결합할 경우 최소 30%는 정도는 비문의 표라고 할 수 있다. 향후 정계개편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3자구도일 경우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는데, 이때 보수층 20%+중도층 10% 결합 효과는 상당한 파괴력을 보일 수 있다. 문재인이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기도 하다. 김종인 발 제 3지대(중도+보수연합)의 후보가 이 30%의 수혜자가 될 수도 있다.


탄핵열차는 종착역에, 대선열차는 이제 그 출발점에 섰다.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불행한 사태 앞에 정치인 그 누구도 이를 드러내고 웃지 못하고 있다. 속으로야 시원하겠지만, 이제 그 탄핵을 만든 사람들이 또 다른 탄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서늘한 현실 앞에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대선열차는 출발했다. 부디 이번 열차는 행복한 종착역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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