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국 정치 수준을 후진국으로 전락시키는 불행한 언사였다. 박근혜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인용결정 발표가 난 뒤 이틀 동안 아무런 입장 표명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지난 3월 12일 청와대를 퇴거하고 삼성동 자택에 도착한 성명에서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사실상의 불복 선언이다. 박근혜는 최소한의 상식적이고 순수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탄핵 인용 뒤 그를 지지하던 사람 중 3명이 사망하는 불미스런 사건도 있었고, 경위야 어찌되었던 그가 3번이나 성명을 발표하며 사과를 하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일체의 사과나 유감 표명 없이, 이번에도 오로지 그가 하고 싶은 말만 토해낸 채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헌법 최고기관인 헌재의 평의 결과를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온 나라가 92일동안 대통령 본인 때문에 혼란을 겪었고 그 와중에 사망자까지 발생했지만 그런 국가분열을 초래한 장본인의 대응 치고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몰상식적이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최소한의 반성과 국력 낭비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의식은 없고 오로지 ‘박근혜’ 개인의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진실 규명만을 외친 셈이다.


박근혜는 자택에 도착한 뒤 마치 금의환양한 대통령처럼 도열한 측근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탄핵을 당한 대통령으로서의 최소한의 품격과 몸낮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지난 1995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 앞 골목 성명서 낭독 장면을 연상시킨다. 12.12와 5.18 내란 사건에 대한 검찰 재수사로 소환을 앞둔 그는 성명서를 낭독한 뒤 고향 합천으로 측근들을 끌고 내려가 버렸다. 당시 전두환은 “검찰의 태도는 더 이상의 진상 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라며 법 집행을 거부하며 저항했다. 박근혜의 삼성동 자택 웃음 세리머니는 바로 전두환의 뻔뻔한 골목 성명서와 닮아 있다. 자신의 불법행위를 정치적 공세로 규정해 모면하려는 것은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비열한 ‘탈법’ 술책이다. 이는 ‘국민들이 곧 국가’라는 헌법정신을 망각한 채 여전히 그들을 통치해야 하는 아랫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기는 권력자의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박근혜는 자신의 헌법 위배 행위를 ‘진실규명을 위한 고난의 길’로 치환하려고 한다. 그는 이제 정치적 핍박을 받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연출할 것이다. 박정희 향수에 젖은 국민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눈물 연습을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기본 책무를 망각한 채 한국 정치를 후진국 수준으로 떨어뜨린 꼴이 됐다. 이제 박근혜 그 자신은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박사모의 회장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 시켰다.


박근혜의 불복으로 한국 정치는 다시 수십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정치의 첫 번째 가치는 공정한 경쟁 속에 승리를 존중해주고 패배를 승복하며 그 제도와 틀을 따르는 것이다. 억울해도 자신이 인정하고 약속했던 경쟁의 룰을 받아들이는 게 정치다. 미국이 거의 매번 대통령 선거 때마다 선거인단과 전국 득표율의 차이로 인한 불미스런 일을 겪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선거결과 발표 뒤 수시간 안에 축하전화로 선거를 승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으로 자리잡은 게 민주주의의 성숙으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박근혜는 그런 선순환의 전통을 걷어차 버렸다. 이제 박근혜 탄핵과 같은 또 다른 불미스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 당사자는 ‘전례’를 따라 그 심한 불복행위를 할 수도 있는 논란거리를 제공한 셈이 됐다. 박근혜의 불복은 우리의 정치에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잡히는 불행한 단초를 제공한 것이 됐다. 그는 나름대로 며칠동안 청와대에서 계산기를 두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대충 이런 것이지 않을까.





‘어차피 탄핵이 된 마당에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그렇다고 저쪽에 전부를 순순히 넘길 수는 더더욱 없다. 끝까지 고춧가루를 뿌려야 한다. 어차피 대선 승리도 못할 바에는 민주당의 발목을 끝까지 잡고 저항하고 견제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20%의 묻지마 보수층 지지세력이 있다. 절대 호락호락하게 나 혼자 죽지는 않는다. 어디 너희들도 잘 되는지 두고 보겠다’


이렇게 계산이 섰다면 순순히 헌재 평의 결과를 승복하기보다 지지세력을 등에 업고 끝까지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게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박근혜 개인에 대한 형사사건의 경우도 정치적 딜을 통해 ‘탕감’되거나 ‘면책’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으로서도 집권한다고 해도 박근혜의 탈레반 식 벼랑끝 전술을 쉽게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다. 핍박받는 이미지를 받으면 받을수록 박근혜는 살아날 수 있다. 사건은 최순실 국정농단에서 박근혜 전직 대통령 핍박으로 옮아가게 될 수도 있다.


본말이 전도되면 정치보복 근절을 구실로 적당히 타협하고 박근혜를 풀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혜가 순순히 잘못을 빌고 승복을 한다고 했을 때도 여전히 정치적 타협을 볼 수 있을까.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박근혜로서는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론에 강하게 맞서 이 판을 형사사건이 아닌 정치적 명분 싸움으로 돌려내야 한다. 여전히 국가 이익은 안중에도 없고 진영논리의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게 박근혜가 2박 3일동안 침묵하며 생각해낸 묘수인 것 같다.





이제 박근혜가 애국심이 있다느니 국가관이 올바르다느니 하는 말은 더 이상 믿지 말았으면 한다. 박근혜는 헌재의 평결도 걷어차면서까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박사모 회장에 불과할 뿐이다. 삼성동 자택에서 진지전으로 들어간 박근혜. 그가 자택에서 흘린 웃음은 그 장기전을 적에게 알리는 신호였다. 또한 박근혜가 적반하장식 웃음을 흘렸다고 해서 분노할 일도 아니다. 헌재가 적시한 그의 헌법 위반 사례를 똑똑히 기억하고 그것이 향후 재판에서 속속들이 법리적으로 규명될 수 있도록 더 냉엄하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단 한 점의 웃음기도 없이.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저작권자 © 피처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