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2017년 9월 25일 뉴욕의 한 호텔. 


북한 외무상 리용호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미국 전략 폭격기가 원산 앞바다 상공을 휘저었다는 뉴스가 대서특필 된 이후이다. 


리용호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북한 지도부에 대해 오래 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공언함으로써 끝내 선전포고를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설령 미국의 전략 폭격기들이 북한 영공을 넘지 않더라도 임의의 시각에 모든 자위적 대응 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예상했던 언급이다. 미 폭격기를 격추하겠다는 위협이다. 그런데 필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말이 귀에 꽂혔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말싸움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자신들이 먼저 시작한 싸움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국이 자꾸 북한을 못살게구니 어쩔 수 없이 대응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피해자 코스프레로 이해할 수도 있다. 


북한 수소탄 실험과 괌 포격 계획 등 일련의 북한 도발이 이번 위기의 시작점인데 북한이 오히려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 강대강 충돌로 치받던 북한이 보기에 따라서는 슬그머니 약세를 보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이 미국의 군사 조치에 당황했을까?


장면 2.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북한이 미국 죽음의 백조가 원산 앞바다까지 날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번 B-1B 비행이 자정 무렵이니 전혀 예상도 못 했고 레이더나 이런 데서도 강하게 잡히지 않아 조치를 못 한 것 같다“고 국정원은 밝혔다. 특히 "미군측도 북한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B-1B 궤적을 공개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북한이 당황하고 깜짝 놀랐을 법하다. 국정원측인 북한이 후발 조치로서 비행기 이동과 동해안 강화 조치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지금까지 북한 반응이 없는 것은 중국 · 러시아와의  상의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북한이 B-1B 비행 사실조차 몰라 당황한 것일까?





북한은 한국 전쟁때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이 쑥대밭이 된 사실을 트라우마처럼 아파한다. 그래서 김정은이 정권을 넘겨받은 직후인 2013년 쯤 평양 상공 방어망을 물샐 틈 없이 만들라고 지시한 사실도 있다. 


그런 김정은이 평양을 초토화할 수 있는 죽음의 백조가 뜬 사실조차 몰랐다고 하니, 나라면 당황했을 것 같다.


장면 3. 김정은의 이례적 문법 


김정은은 지난 22일 이례적으로 본인 명의의 성명을 냈다. 트럼프의 완전 파괴 발언에 맞서 사상 최고의 초강경 조치를 신중하게 고려한다며 맞불을 놓은 바로 그 성명이다. 그런데 그 성명에도 보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이 있다. 


김정은이 트럼프가 유엔연설에서 그렇게 세게 나올지 몰랐다고 털어놓은 문장이다. 


김정은은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세계최대의 공식 외교무대인 것만큼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가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망탕 내뱉든 것과는 다소 구별되는 틀에 박힌 준비된 발언이나 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트럼프의 발언에 놀랐다는 걸 굳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정은 이후 문장에서 더 센 말들로 트럼프와 미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김정은도 내심 당황한 걸까?


장면 4. 대북 경제 제재 조치에 당황했나?


북한 수소탄 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유엔 안보리 결의 2375호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북한은 외무성 보도를 통해 반발했다. “안보리 결의 2375호는…전면적인 경제봉쇄로 북한과 북한 인민을 완전히 질식시킬 것을 노린 극악무도한 도발 행위의 산물"이라고 반응한 것이다. 


국제사회는 '반쪽 짜리 제재안‘이라며 평가가 박한데 북한은 '봉쇄당해 질식할 수도 있다'면서 "준열히 규탄하며 전면 배격한다"고 펄펄 뛴 것이다.


8월 초 북한 ICBM 발사에 대응한 유엔 대북 제재 2371호가 나왔을 때도 북한은 “정상적인 무역활동과 경제교류까지 전면 차단하는 전대미문의 악랄한 결의”라고 반발했다. 


최근의 대북 제재안이 북한 경제에 압박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당황한 것일까?


이런 와중에 평양의 기름값이 급등하고 있다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AFP는 평양의 한 주유소 직원의 말을 인용해, “9월 22일 1㎏에 1.9달러였던 것이 24일엔 2달러”라며 “앞으로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도 평양의 기름 값이 지난 21일을 기점으로 급등했다고 24일 평양 주재 서방 외교관의 전언을 인용해 보도했다. 통일부도 북한의 기름값이 연초 대비 3배나 올랐다고 밝혔다.





경제 제재로 북한이 당황하게 될까?


이런 가운데 주목되는 움직임 2가지가 있다.


먼저 북한 측 움직임이다. 북한 대미외교의 핵심 실무자인 최선희 국장이 9월 25일 러시아를 방문하는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맞대결 성명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된 상황이어서 북한의 외교 채널 가동은 눈에 띈다. 특히 최근 중국과의 관계가 냉랭해진 북한으로서는 러시아가 현재로선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자국이 마련한 북핵 해법 방안을 제시하는 등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 나서고 있다.


러시아의 북핵 단계적 해결방안은,

 

1단계 북한 핵 · 미사일 시험 중단 및 핵 비확산 공약 대 한·미 연합훈련 축소 혹은 중단 → 2단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3단계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지역 안보체제 논의 라는 로드맵으로 짜여진 걸로 전해졌다.


미국 측의 언명도 간과해선 안될 듯하다. 


맥 매스터 미국 백악관 NSC 보좌관은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미국이 북한 정권과 협상하기 전, 북한은 핵시설 사찰을 받아들이고 핵무기를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그는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탄도미사일을 획득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며 "북핵 위협을 완전히 해결할 4∼5가지 시나리오를 찾고 있는데 일부는 험악하다"며 북에 대해 압박을 빼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 안보 보좌관이 핵 사찰과 핵무기 포기 용의라는 걸 협상의 시작점으로 제시한 것은 의미가 있다. 


북한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필자의 희망적, 역설적 관측대로 북한이 당황하고 있다면 북한에 남겨진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항복성 대화냐, 명분있는 대화냐 아니면 강대강 충돌로 인한 파국이냐, 북한이 그나마 명분도 살리고 덜 당황해도 될 그런 옵션을 선택하기를 희망한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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