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고위급 회담이 2018년 1월 9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2015년 12월 남북 차관급 회담 이후 25개월 만이다. 


남북 회담이 열리면 내용과 합의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게 남북 회담 대표의 ‘모두 발언’이다. 회담 대표의 첫 발언을 들으면 회담이 어떻게 진행될지, 얼마나 진통을 겪을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란하고 또 비유적인 표현을 동원해 상대방의 기존 태도를 은근슬쩍 꼬집기도 하고, 또 후리면서 기선 제압에 나서려 한다. 속담이나 한시, 날씨 등의 남북 대표들의 ‘밀당’ 수사학(修辭學)의 주요 소재다.


①날씨 


이번 고위급 회담에선 북측 리선권 대표가 날씨를 걸어 먼저 치고 나왔다.


“온 강산이 꽁꽁 얼었다. 북남관계는 더 동결됐다. 하지만 민심의 열망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 민심과 대세가 만나면 천심이라 했다. 천심을 받드는 자세로 회담에 임하자”며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책임이 남측에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흘리더니 “성실한 자세로 진지하게 하면 회담은 잘 될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치고 나왔다. 게다가 회담 자체를 아예 공개 하자는 선전전으로 남측을 압박했다. 


②속담 


남측 조명균 대표는 속담으로 응수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 마음으로 회담을 끌어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오랜 단절 끝에 모처럼 만났으니 몽니 부리지 말고 쟁점을 잘 타협하자는 북에 대한 압박이다. 하지만 동시에, 평창올림픽 뿐 아니라 핵 문제 등 우리 측 요구를 끈질기게 제기하겠다는 심산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조명균 대표는 “동시에 상충되긴 합니다만 '첫술에, 첫 숟갈에 배부르랴' 하는 그런 얘기도 있다"면서 "끈기를 갖고 하나하나 풀어가자“고 했다. 북측 입장만을 듣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일합을 겨룬 남북 대표. 이제 치열한 샅바싸움의 시작이다.


③ 한시 인용



▲ 지난 2015년 12월 개성공단에서 제1차 차관급 남북 당국회담 1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남측 수석대표인 황부기 통일부 차관(왼쪽 2번째)과 북측 수석대표 전종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오른쪽 2번째)이 회담 전 악수하고 있다.



2015년 12월 남북 차관급 회담 때에는 우리 측이 한시를 인용하며 북측 태도를 비판했다. 


당시 황부기 남측 대표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선생의 애송시 ‘야설’을 언급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는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어지러이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제발 후손을 위해 어지럽게 걷지 말고, 좌충우돌 하지 말고, 한반도와 남북관계를 순조롭게 하자는 뼈를 말 속에 담은 것이다. 북측 전종수 대표는 “장벽을 허물어 대통로를 열자”며 남측의 5.24 조치 등 각종 대북 제재를 우회적으로 비판했지만 수사학의 주목도에서는 남측의 우세였다.


④ 절기와 고사성어 인용 그리고 직설


남북관계가 좋았던 2000년대 초반 남북회담에서는 덕담이 자주 오갔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한 손으론 박수소리가 나지 않으니 협력하자는 덕담, 간밤에 ‘용꿈’을 꿨다는 길몽,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는 비유 등으로 남북 회담 대표의 수사학은 더욱 현란해 졌다.


하지만 북한 핵 문제가 돌출된 이후 열렸던 2002년 10월 평양 남북 장관급 회담은 분위기가 냉랭했다. 



▲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오른쪽)과 북한 김령성 내각책임참사가 지난 2002년 8월 남북장관급회담장인 신라호텔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남측 대표가 먼저 24절기와 날씨를 언급하며 작심하고 몰아붙였다.


南 정세현 : 날씨를 보니 하늘이 내려앉았는데, 비가 오려는 지 날씨 만큼이나 마음이 무겁다. 이제 곧 서리 내리는 상강인데, 서리가 내리면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해야 하는데...“


북측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北 김령성 : 바깥 날씨가 어떻든 서풍이 불든, 비가 오든, 우리는 갈 길을 갔다. 바깥 날씨가 어떻든 우리 민족끼리 손을 더 굳게 잡고 해결해 나가자


미국이나 외부 정세 신경 쓰지 말고, 우리민족끼리 잘하자는 북측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남측이 어떻게 대꾸할까 궁금했는데, 북측 대표를 한 마디로 쏘아붙인다.


南 정세현 : 바깥은 너무 추운데 방안이 따뜻하면 감기에 걸린다. 


북 핵개발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국면으로 자칫 남북관계가 불투명해 질 수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경고인 셈이다. 당시 회담은 언중 유골의 ‘모두 발언’만큼이나 진통을 겪었다. 결국 ‘한반도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핵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해서 해결한다.’는 문구를 넣은 데 합의했다. 


하지만 합의는 결국 합의에 그치고 말았다.


지난 18년 동안 수많은 남북 회담이 있었고, 현란한 수사와 레토릭은 그때마다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번 회담에서는 그리고 이후에 있을 남북 회담에서는 화려한 수사 만큼, 회담 내용도 함께 알찼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연/통일전문기자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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