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54)가 항소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무죄였던 1심 판결이 뒤집혔다.


1일 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 부장판사)는 안 전 지사의 10개 혐의 중 9개를 유죄로 판단하고 이같이 선고했다.


피해자 김지은씨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위력'에 대해 폭넓게 해석한 것이 판단을 갈랐다. 


앞서 1심 재판부는 김지은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의 진술이 주요 부분에 있어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김씨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감정을 진술한 만큼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김씨가 자신에게 다소 불리한 부분을 솔직하게 진술한 것도 신빙성 판단에 도움이 됐다. 


재판부는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사소한 부분에서 다소 일관성이 없거나 최초 진술이 다소 불명확하게 바뀌었다 해도 그 진정성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씨가 성폭행 피해 경위를 폭로하게 된 경위도 자연스럽고, 안 전 지사를 무고할 동기나 목적도 찾기 어렵다는 게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오히려 "동의하에 성관계한 것"이라는 안 전 지사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첫 간음이 있던 2017년 7월 러시아 출장 당시엔 김지은씨가 수행비서 업무를 시작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시점이었고, 김씨가 체력적으로도 힘든 상태였다는 점 등을 볼 때 합의하에 성관계로 나아간다는 게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상황이 발생한 이후 안 전 지사가 김씨에게 지속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한 것도 김씨의 의사에 반해 간음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업무상 위력'에 대해서도 반드시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유형적 위력'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안 전 지사의 사회적 지위나 권세 자체가 비서 신분인 김씨에겐 충분한 '무형적 위력'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다만 안 전 지사가 2017년 8월 도지사 집무실에서 김씨를 추행했다는 공소사실에 대해선 증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유무죄 판단을 마친 재판부는 "피고인은 현직 도지사이자 차기 대권 주자로서 자신의 보호·감독을 받는 피해자를 그 의사에 반해 9차례 걸쳐 범행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은 피해자가 지방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상 특징과 비서라는 관계 때문에 피고인의 지시를 순종해야 하고 내부적 사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현저히 침해했다"고 질타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김씨가 입었을 고통도 상세히 열거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 실명과 얼굴을 드러낸 채 뉴스에 출연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고, 범행 자체로도 성적 모멸감과 함께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근거 없는 이야기가 유포돼 추가 피해를 보았다"며 2차 피해의 심각성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런데도 피고인은 피해자와의 사이에 호감이 형성돼 성관계가 있었을 뿐이라며, 도의적·사회적·정치적 책임 외에 법적 책임은 질 이유가 없다며 극구 부인했다"고 질타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위력'이라 할 만한 지위와 권세는 있었으나 이를 실제로 행사해 김씨의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볼 증거는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서울과 해외 출장지인 러시아, 스위스에서 전직 수행비서 김지은씨에게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강제추행 5회 등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치권에서는 여권의 '안이박김 살생부' 음모론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 "안희정, 이재명 날리고 박원순은 까불면 날린다는데, 그러면 김은 누군가.”


지난해 10월 조원진 대한애국당 의원(당대표)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이 다시 정가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구속되고 안희정 전 지사마저 법정구속되면서, 이른바 ‘안·이·박·김’ 정치 살생부의 저주가 재차 회자되고 있다. 그동안 안·이·박·김 논란은 다양한 시나리오로 번져나갔다.


대표적인 것은 친문(친문재인) 진영에서 성골, 진골이 아닌 이들을 하나둘 제거한 뒤 차기 대통령을 자기 계파 인물로 옹립한다는 시나리오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미투(#MeToo·나도 폭로한다)’ 사건으로 사실상 대선 레이스에서 탈락하고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여러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기소되면서 안·이·박·김 시나리오에 힘이 실렸다. 박원순 서울시장 역시 친문 쪽에서 지원하는 대선 잠룡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언제든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번졌다.


정치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안·이·박·김의 ‘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렸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주저앉힐 것이란 관측이 그중 하나였다. 안·이·박·김의 ‘김’을 살생부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반면 ‘김’이 김 지사를 의미하는 것이란 해석도 있었다. 마지막 김은 살생부의 대상이 아니라 지원의 대상이라는 의미다. 최종적으로 김 지사를 밀기 위해 잠재적 위협 후보군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차기 대선판을 만들 것이란 시나리오다.


하지만 김 지사는 옹립의 대상은커녕 ‘드루킹 의혹’에 휩쓸리면서 정치 생명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놓였다. 결과적으로 안·이·박·김의 유력 시나리오는 예상과는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다만 김 지사를 정치적인 위기로 몰아넣은 주체는 여권의 ‘특정 세력’이 아니라 법원이라는 점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안·이·박·김 논란이 특별한 근거도 없이 번진 이유는 정치 현실의 반영이라는 시각도 있다. 여당의 차기 집권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미래 권력 창출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정치 음모에 가까운 안·이·박·김 논란이 번지는 것 자체가 한국 정치의 후진성, 폐쇄성을 드러내는 징표라고 받아들이는 인식도 있다.


안희정 전 지사가 법정구속되면서 여권 내 유력한 차기주자는 하나 둘씩 '순삭'되고 있다. 안이박김 살생부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긴장할 만도 하다. 그도 아들의 병역비리, 부인의 외부활동 등을 두고 그동안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정책과 리더십이 아닌 개인 사생활의 관리에 의해 국가 지도자가 결정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현재 한국의 정치 지형도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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