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11일 낮 12시35분 쯤 광주지법 법정동 후문 입구에 도착하자, 맞은편에 있는 광주동산초교 창가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불린 노래가 다시 울렸다. 창가에 매달린 학생들은 전 전 대통령이 말 없이 들어선 법정을 향해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이를 바라보던 광주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날 전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낸 광주지법 주변에선 크고 작은 집회가 이어졌다. 광주 지역 민중당원 20여명은 법원 정문에서 ‘광주 시민 기만하는 학살자 전두환을 처벌하라’ ‘전두환은 사죄하고 죗값을 받으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차에 타고 이동하던 시민들은 집회 행렬을 보며 “전두환 구속시키라”고 호응하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을 태운 차가 들어선 광주 동구 준법로의 법정동 인근엔 취재진과 시민들이 몰렸다. 후문 부근엔 5·18 당시 죽거나 다친 광주시민들의 사진이 진열됐다.


전 전 대통령은 “5·18당시 발포를 부인 하느냐” “광주 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등 취재진의 질문에 “왜 이래”라고 짧게 대꾸한 뒤 법정 안으로 들어섰다.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3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출발해 4시간여만에 광주에 도착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300여 명이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 중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검찰은 1994년에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에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2001년 당시에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88년 7월,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국방부 답변자료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8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나이 가장 어린 사망자는 4세 가량의 남자 어린이로서 1980년 5월 27일 자로 목에 관통상을 입어 숨졌으며,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에 계엄군이 어린이들에게까지 총을 겨눴다는 사실이 드러나, 5.18 유족회 측이 학살자들에게 단호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에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5년에 1980년 당시의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는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 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53]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에 달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50년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었으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 지식인 중심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집권세력에 대항해 최초로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 저항 운동의 수준과 한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뚜렷한 지도부와 이념적 프로그램이 결여된 상태에서 일어난 비조직적 군중의 자연발생적인 자구행위였으며, 방어적이고 대중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1970년대식 반독재시민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 항쟁의 주체들은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진압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이전의 친미적인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두환은 이날 인신구속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법정에 출두했다. 그의 출두를 지켜보던 초등학생들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널리 불려졌던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라는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2000년 대 이후 출생한 그 초등학생들이 그 노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광주의 살인은 영원히 기억돼야 한다. 세대를 떠나 독재자의 압제에 항거하다 희생됐던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똑똑하게 기억해야 한다. 전두환이 법정에 출두한 날, 초등학생들이 부른 바로 그 노래는 1980년 5월의 아픈 추억으로 되돌리는 촉매가 되었다. 역사에 대한 망각은 후세에 더 큰 아픔으로 전해질 것이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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