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UN 사무총장이 한국을 방문해 한마디로 뽕을 뽑고 간 모양이다. 방한 첫날부터 대권 도전을 시사하는 발언으로 ‘어그로’를 끌더니 JP 자택 방문 등의 정치성 이벤트를 보란 듯이 펼치고 다녔다. 방송용어로 말한다면 대권드라마를 앞두고 ‘분량’을 거의 다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5박 6일 동안 무주공산 대권판을 헤집고 다닌 뒤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그뒤 뉴욕에서 기자들에게 “이번 방한은 아무런 정치적 의미가 없다”며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줄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정치일정을 보면 정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일단 관훈클럽 토론회 참석은 끝까지 가지 말지 고민하다 결국 초청에 응했다는 후문이다. 관훈 토론회가 웬만한 정치지도자들은 한번씩 서는 꿈의 PR 무대라는 점에서 반기문은 사실상 대권 데뷔전을 치른 셈이다.



그의 출사표는 이렇다.

“국가가 너무 분열돼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 통합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우선순위는 남북통일이지만 그 전에 남한이라도 통합해야 한다.”(관훈클럽 발언)

이를 그의 심중과 연결해 다시 꾸며보면,

“지금 내 눈에는 이런 아수라장 정치판을 해결할 대권 주자가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대권 주자들은 지지율 반등 기미가 보이지 않고, 노력해봐야 내 상승세를 꺾지 못할 거 같다. 우선 새누리당부터 접수한 다음에 대선은 내 전공 남북통일로 뚫고나가겠다.”


필자는 반기문이 ‘아’ 했는데 ‘어’로 잘못 해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기문은 마땅한 대권주자가 보이지 않는 정치판의 틈새를 보기 좋게 공략하고 있다. 관훈 간담회 당시 한 참석자는 “뜻밖에 기대를 훨씬 웃도는 발언에 질문하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라고 밝혔다. 기름장어에다 ‘황희정승 화법’의 달인인 그가 정치판의 고수들을 모아 놓고 어린애 옹알이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대권 언급’을 한 것만 봐도, 그간 그가 어떤 생각으로 한국의 일간지를 펼쳤을지 상상이 간다. 그동안 그를 대선주자 여론조사 대상에 넣느니 마느니 논란이 일 때도, 올해 총선 전 집권세력이 그를 통일 대통령으로 점찍으며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때도, 아마도 그는 일간지를 부여잡고 화장실에서 웃음 꽤나 흘렸을 거 같다. 9년 동안 ‘꽃보직’으로 군 생활을 했던 말년 병장이 예비군 훈련도 열외를 받고 싶어하는 상황이랄까.


▲ 게일로드 페리는 부정투구의 달인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아무튼 호떡장사는 호떡만 팔고, 청소부는 청소만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세상을 바라는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반기문의 정치판 기웃거림은 영 심기가 거슬린다. 혹여 반기문이 ‘내 능력으로 UN 사무총장에 올랐으니 까짓것 대통령은 왜 못하겠느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실제로 그는 이번에 방한해서 “내가 대통령을 한다고 예전에 생각해본 일도 없다. 하지만 이런(대선 출마) 얘기가 나오는 데 대해, 인생을 열심히 산 것에 대해 ‘헛되게 살지 않았고 노력에 대해 평가가 있구나’ 자부심을 느끼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력에 대한 평가’가 좋기 때문에 대통령도 해볼 만한 것 아니냐는 뉘앙스가 느껴진다는 너무 오버일까.


5박 6일의 반기문의 깜짝 일정과 언행, 행보를 보며 든 생각은 반기문이 뭔가 큰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과연 친박이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해 줄까? 그는 진짜 자신의 외교통일 경력이 정치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치판의 분열을 비판하는 그는 과연 그것을 해결할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과연 국민들은 그가 대권판에 오른다면 기특하다며 예뻐해줄 것인가?


던진 질문에 자답해본다. 먼저 친박 추대론의 실체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친박진영의 분위기부터 일단 살펴보자. 필자는 총선을 두 어 달 앞두고 친박진영의 한 핵심인사 측근을 만나 ‘반기문 대권론’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때 필자가 느낀 점은 실제로 친박진영에서 반기문 카드를 차기 대권주자로 적극 검토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총선에서 친박과 새누리당이 이렇게까지 패배할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할 때였다. 그들은 여전히 박근혜라는 유력한 선거 카드를 믿고 있었다. 더구나 참모들은 ‘역대 정권과 비교해 우리만큼 참모나 측근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정권을 본 적이 있느냐’며 자화자찬까지 할 때였다. 여론이 조금 좋지 않지만, 총선이 되면 국민들이 그 충정을 알아줄 것이라고 했다. 친박에선 김무성은 기실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기 때문에 반기문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친박의 생명줄을 연장할 계산이었다. 그들은 친박과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과반 이상 이길 것을 전제로 반기문 카드를 실제로 믿었고, 추진하려 했던 거 같다.


그 핵심 측근은 “헌법에 있는 총리의 역할을 크게 강화하는 것을 일단 전제로 해야 한다. 개헌이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이원집정부제를 기반으로 반기문 외교 대통령, 김무성 총리 정도로 만들면 어떨까 한다. (당시만 해도 공천파동 전이라 김무성과 친박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고, 친박도 김무성에게 총리자리를 준다면 잘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 같다) 친박이 김무성을 잘 구슬린다면 반기문 외교대통령(권력균점제) 카드가 상당히 경쟁력이 있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선거에서 친박이 패배하면서 반기문 카드는 추진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무엇보다 박근혜와 친박의 힘이 많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내부주자의 경우 여러 가지 저항이 있어도 타협이 가능한 부분이 있지만 외부주자 영입의 경우 당 전체가(비박까지 포함하는) 큰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경우 외부주자 영입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김대중 정권 시절 동교동계가 이인제를 영입해 밀어붙였지만 결국 실패한 케이스도 있다). 오히려 내부의 태클에 의해 영입인사가 더 빨리 데미지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벌써부터 반기문 카드에 대해 비박계 진영에서는 반기문 죽이기의 성향을 살짝 살짝 보여주고 있다. 역대 대선에서 집권세력이 차기 대권주자를 내 성공한 예는 많지 않다. 김영삼은 실패했고 김대중도 할 수 없이 노무현을 밀었고 이명박도 실패했다. 집권 세력의 정권 재창출은 한국인들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카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그 누가 누워서 떨어지는 떡을 받아먹은 사람이 있었던가. 지금의 반기문은 친박 추대론이라는 허상만 바라보며 누워있지는 않은지 되묻고 싶다. 이게 그의 첫 번째 착각이다.


▲ 페리는 은퇴 뒤 바셀린 광고까지 찍어 폭소를 자아냈다.


혹여 반기문이 그의 40년 외교통일 경력이 정치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대재앙이라고 본다. 멀리갈 것도 없다. 안철수만 봐도 알 수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로 정상에 오른 것을 배경으로 그는 지금 정치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간극은 얼마나 먼 것인가. 2012년 안철수 바람은 지금의 반기문 신드롬(?)과는 비교할 바가 아닐 정도로 강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청와대를 먹을 뻔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 미몽에서 깨어났을 때, 안철수라는 지도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했을 때, 그것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그 바람을 다시 되돌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지난 총선에서 그 바람의 끝자락을 일단 잡긴 했지만 그것이 대권이라는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력이 필요한 것일까. 그건 누구보다도 안철수 본인이 잘 알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안철수와 반기문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바이러스 잡다가 온 사람과 외교일-대부분의 일이 의전과 형식, 기수 출신학교 따지기에 익숙한 외교부의 스타일상- 하다가 온 사람들이 갑자기 이전투구 정치판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머리좋고 똑똑하기로는 반기문 못지 않은 안철수만 보더라도 답은 나온다.


반기문은 이번 방한에서 현재의 정치판을 두고 ‘너무 분열돼 있다’며 디스했다. 자신이 그 분열을 통합시킬 지도자라는 걸 은근히 보여주려 했다. 그런데 반기문이 박근혜도 하지 못한 그 극심한 분열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분, 자신의 이미지가 ‘통합’이라는 아주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있지는 않을까. 도대체 반기문이 ‘통합의 지도자’라는 등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건 반기문의 희망사항이라고 믿고 싶다. 통합은 인상 좋은 아저씨가 말 안 듣는 정치인들 불러 놓고 ‘그러면 안 돼’라고 구슬리는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은 과연 그가 대권판에 등판하면 지지를 해 줄 것인가. 반기문이 지금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국민들이 바로 ‘그때’ 자신을 예뻐해줄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착각은 자유다.


성기노 에디터 trot@featur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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