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우리한테는 시간이 귀중한데…”  


2019년 2월 28일 오전 8시 55분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 회담장. 


“훌륭한 대화가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김정은 위원장의 말에 “북한은 좋은 잠재력을 갖고 있으니 돕고 싶다”는 화답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린 트럼프 대통령. 불쑥 한마디 덧붙인다.


“처음부터 말했듯이 속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정은 위원장, 예상치 못한 발언인 듯 바로 뒤에 자리한 통역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우리한테는 시간이 귀중한데…”


경제 발전을 위해 하루 속히 대북 제재를 풀어야 한다는 김정은의 속내가 드러난 걸까? 무심코 말을 뱉고 난 뒤 김정은은 ‘아차’싶었을까? 


자칭 ‘거래의 달인’ 트럼프는 이 순간을 파고들더니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못을 박아버린다. 


“저희(미국)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적절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초점을 둘 겁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책 「거래의 기술」에서 “협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타결 짓기 위해 필사적으로 보이는 것 (The worst thing you can possibly do in a deal is seem desperate to make it)”이라고 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정은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두 정상은 약 35분간의 단독 회담을 마치고 정원을 산책하며 확대 회담장으로 이동했다.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 당시 100보 산책과 유사한 장면이었다. 회담장 밖에 있던 김영철 부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 등을 만나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어진 확대정상회담. 하지만 두 정상이 자리를 잡자 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취재기자들이 갑자기 질문을 퍼부은 것이다. 


‘비핵화 할 준비가 돼 있느냐, 북한 인권문제를 논의하느냐’ 같은 민감한 현안을 두 정상에게 직접 묻더니 김정은을 향해 ‘평양 연락사무소 개설’ 준비가 되어 있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참다못한 리용호 외무상이 ‘기자를 내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지만 트럼프는 김정은의 답변이 듣고 싶다며 재촉했다. 김 위원장이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답변하는 장면이 그대로 생중계됐다. 정상회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비핵화 의지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김정은의 말에 회담 전망은 더 밝아보였다. 예정된 시간을 30분가량 넘겼는데도, 또 두 정상이 업무 오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별다른 의심보다는 심도 깊은 논의 때문일 것이라는 관측이 이어졌다. 청와대도 “북미 정상이 오후에 합의문에 서명하면 휴지기에 있었던 남북대화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청와대의 언급이 있은 지 10여분 만에 외신들은 ‘트럼프의 기자회견이 예정보다 2시간 앞당겨 졌으며 오찬과 서명식이 불투명하다’는 소식을 쏟아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업무 오찬을 취소하고 회담장을 떠났다는 속보까지 나오면서 이상기류가 증폭됐다. 급기야 미국 백악관이 공식 입장을 밝혔다. “양측은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예상 밖의 장면은 있었지만 협상이 깨질 것이라고는 상상치 않았는데 몇 시간 만에 분위기가 급변한 것이다. 언론들은 ‘하노이 노딜’ 뉴스를 전 세계로 타전했다.


2018년 5월 트럼프는 ‘협상을 해 보면 100퍼센트 확실했던 것도 안 되는 경우도 있다’면서 ‘조건이 맞지 않으면 협상장에서 걸어 나올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그 말이 1년 만에 현실이 된 것이다. 






② “북한은 더 통 크게 협상에 나서야”


결렬의 원인은 영변+α였다. 


회담 결렬 후 기자회견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이 영변 핵 시설 전체를 전적으로 해체할 용의를 보이면서 전면적인 대북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는 협상장에서 걸어 나오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가 극적인 협상 결렬을 선택한 이유가 함축된 발언 한 토막.


“그 나라를 매우 잘 안다. 미국은 그 나라 구석구석을 알고 있다 (We know every inch of that country).” 


영변 이외 지역에도 핵 시설이 존재하고, 무슨 시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미국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영변 핵 폐기만 받고 제재를 풀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북한이 영변이라는 거대한 핵 시설의 해체라는 매력적인 카드를 제시했지만, 미국이 원하는 완전한 비핵화와는 거리가 있기에 대북 제재도 풀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트럼프의 책 「거래의 기술」에는 크게 생각하기, 최악 예상하기, 선택의 폭 최대한 넓히기, 지렛대 활용하기, 거래를 재미있는 게임으로 만들기 같은 11가지 협상 원칙이 열거돼 있다. 


하노이 협상을 ‘합의 없이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트럼프.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협상 원칙을 분명하게 천명했다. 


“나도 제재를 풀어주길 원한다. 그 나라가 성장하길 원하기 때문에…하지만 우리가 한 단계만 얻어내고 모든 지렛대를 포기하면 다시 지렛대를 확보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우리는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을(완전한 비핵화) 얻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재 해제는 '큰 양보'(big give)이기 때문에…그래서 우리는 북한 제안으로부터 걸어 나와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면서 김정은 위원장과의 1박 2일 하노이 회담은 매우 건설적인 논의였으며, 김정은도 훌륭한 자세를 보였다고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해 더 통 큰 자세로  협상에 전면적으로 임할 것을 요구했다.


③ “미국식 계산법 이해하기 힘들어”


합의 불발에 당혹한 북한. 트럼프가 하노이를 떠나고 한참이 지난 밤 12시 13분. 북한 대표단은 자신들의 숙소인 멜리아 호텔에 전 세계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기자회견에 나선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은 미국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변 핵 단지 전체, 그 안에 있는 모든 플루토늄 시설과 모든 우라늄 시설을 포함한 모든 핵시설을 통째로 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하자는 역사적 제안을 내놓았다.”


북한이 ‘역사적 제안’ 대가로 요구한 건 제재를 일부 풀어 달라는 것.


“우리가 요구하는 건 전면적인 제재 해제가 아니라 일부 해제, 구체적으로는 유엔 제재 11건 가운데 2016∼2017년 채택된 5건, 그 가운데 민수 경제와 인민 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다.” 


북한은 또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시험 발사를 영구적으로 중지한다는 확약도 문서 형태로 줄 용의”를 밝히면서 자신들의 안이 신뢰조성과 단계적 해결 원칙에 따른 현실적 제안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이 같은 제안에 그러나 미국은 노(No)라고 답했다. 


2016년 이전 채택된 대북 제재 결의안은 사실상 효과가 없었으며 2016년 이후 결정된 대북 제재가 북한에 커다란 압박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북 제재를 먼저 풀면 영변을 주겠다’는 북한 제안은 미국으로선 ‘완전한 비핵화 없는 제재 해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이 ‘영변 핵폐기 조치 외에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해 자신들의 제안을 차버렸다며 ‘앞으로 이런 기회가 차려질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힐난했다.


결국 ‘하노이 노딜’은 미국과 북한이 바라보는 핵 폐기와 최종 목적지, 그리고 도달하기 위한 과정 모두가 천양지차임은 확인시켜 준 것이다.


미국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래는 일종의 예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캔버스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또 훌륭한 시를 쓴다. 그러나 나는 뭔가 거래를 하는 것이 좋다. 그것도 큰 거래일수록 좋다. 나는 거래를 통해서 인생의 재미를 느낀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 이라는 예상 밖 상황에 직면한 김정은 위원장은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최선희 부상의 말이다.


“이번 수뇌회담을 옆에서 보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께서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민생과 관련된 제재의 부분 해제까지 어렵다는 미국을 보면서 김정은 위원장 동지께서 앞으로의 북미 거래에 대해 의욕을 잃지 않으시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트럼프 식 ‘거래의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김정은. 


다시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지 아니면 2019년 신년사에서 언급한 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지, 한반도 상황은 이제 다시 안갯속이다.



김연/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김연 통일전문기자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10여년동안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를 취재했다. 지금은 모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관련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인동의 시절에 꽃피는 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북관계와 통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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